

사진첩

Eugene Delacroix <민중을 바리케이트로 이끄는 자유>
부제:
1830년 7월 28일. 1831년 작
들라크루아(1798~1863)의 유명한 그림. 보통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원래 제목은
<민중을 바리케이트로 이끄는 자유
La Liberté guidant le peuple aux barricades>. 같은 말 같지만 어감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대체 '자유'라는 저 양반은 누구일까? 그는 왜 민중을 이끌었을까? 왜 민중들과 바리케이트로 가려고 했을까? 게다가 옷은 왜 벗었을까?

때
는 바야흐로 베토벤이 베를린 대학에 입학하고 괴테가 21세 연하의 크리스티아네와 깨 쏟아지는 동거를 시작하던 1789년. 옆나라
프랑스에선 대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 대혁명은 정치문화에 있어서도 일련의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앙시앙 레짐기(혁명이전)의
정치적 숭배는 국왕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므로 국가의 상징을 굳이 만들어 낼 필요가 없었다. 굳이 끄집어내자면 부르봉 왕가의
상징인 백합 정도가 될 것이다. 이러한 상징을 알레고리라고 하는데, 왕가의 휘장이나 독수리와 같은 동물(독수리는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나폴레옹 시대의 상징이었다.)을 통해 드러났다. 그러나 이 시기 가장 효과적인 상징은 국왕 그 자체였다. 실존하는
국왕이 있으니 다른 상징을 많이 쓸 이유는 없었다. 당연히 국왕의 초상이 자주 그려졌으며 화폐에는 늘 국왕의초상이 새겨졌다.

영국의 국왕이자 인도의 황제였던 조지 6세가 세겨진 은화
홍세화는 한국의 시민사회가 공화국에 대한 인식이 매우 희박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한국인에게 공화국이 뭐냐고 물으면 '왕 대신
대통령 뽑는 거'라고 한다며 이를 개탄했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적어도 19세기 프랑스가 한국보다 잘난 건 별로 없다. 자코뱅을 비롯한 수많은
공화파 지식인들은 공화국과 공화주의를 민중들에게 설명하느라 애를 먹었다. 결국 그들이 발명해낸 것이 공화국의 알레고리化였던 것이다. 구체적
실존으로 존재했던 국왕이라는 상징대신 '자유'라는 이름의 여성이 등장했다. 물론 '평등'과 '박애'도 있었지만... '자유'만큼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게다가 그림에 여려 명이 있으면 일일이 설명해주는 것도 힘들었다.) 공화주의를 설명하긴 어려웠으나 그림을 보여주면서 로맨틱한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일은 상대적으로 쉬웠다. 테르미도르 반동이후 피신해있던 자코뱅주의자 장 루이 다비드에게 파격적인 지원을 해주며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던 나폴레옹의 사례만
보더라도 이 시기 예술 작품이 대중(대중이라고는 하지만 주로 파리중심의 '일 드 프랑스' 지역 주민들이겠지)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 해 볼 수
있다.(다비드의 그림중 나폴레옹이 말을 타고 알프스를 넘는 그림이 매우 유명한데, 홉스봄은 이를 두고 '다비드의 그림이 전시되면서 나폴레옹은 인간에서
초인-황제-이 되었다.'라고 서술했다.)
Jacques LouisDavid 알프스 생베르나르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실제로 나폴레옹은 노새를 타고 알프스를
넘었다.
공화국의 상징 ‘자유’는 왜 여성이었을까? 왕국의 상징 즉 국왕과 대비되는 의미에서 공화국은 남성 왕이 아닌 여성을 그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불어로 공화국
Republique은 여성형 명사다. 그는 반드시 프리지아 모자를 머리에 쓰거나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프리지아 모자는 자유의
상징으로서 고대 로마의 노예들이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면 처음으로 썼던 모자였다.(원래 노예는 모자를 쓸 수 없었다.) 프리지아 모자와 여성이
‘자유’의 상징으로 채택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고전주의의 영향이다. 유명한 자코벵화가였던 다비드의 그림에서 보여지듯이 이 시기
혁명가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공화정과 문화를 많은 부분 차용하였다. 이후 맑스가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이들은 “로마의 의상을 입고 로마의
언어를 쓰며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했다.(루이 보나파르트와 브뤼메르 18일) 때문에 ‘자유’는 고대의 의상과 분위기를
자아냈다.

프랑스 혁명기에 그려진 마리안느의 그림. 안정적이고 위엄있는 공화국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혁명이 나폴레옹 시대로 넘어가면서 이러한 알레고리화는 점차 사그러들었다. 혁명이 패배했으니 혁명적 상징들이 자취를 감추는 것은
당연했다.
이러한 일련의 상징들이 다시 무대로 복귀한 것은 1830년 7월 혁명을 통해서였다. 7월 혁명은 빈체제 성립이후 안정화되던
유럽세계에 일대 충격을 주며 다시 변혁의 물결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그리고 공화국의 상징 '자유'는 다시 등장했다. '자유'라 불리던 이 여성은
훗날 마리안느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된다. 마리안느라는 이름은 성모 마리아와 그의 친정(?) 어머니인 안느의 이름의 합성어로 추측되는데, 당시에는
가장 친근한 여성의 이름이었다. 우리식으로 치면 ‘순이’정도가 될 것이다. 처음에는 혁명에 반대하는 귀족이나 부르주아지들이 경멸조로 사용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이름은 시민권(?)을 획득하게 된다. 100프랑 화폐에는 마리안느의 얼굴이 그려진 것으로 알고
있다.아, 지금은 유로화를
쓰지...
마리안느를 어떻게 그려내느냐에 따라서 그림을 그린 화가나 주문자, 혹은 시대적 상황들을 읽을 수가 있다. 1848년 6월 봉기
이후 만들어진 그림이나 포스터 판플랫등을 보면. 자유는 편안하게 앉아있거나 서있고, 배경은 목가적인 경우가 많다. 당시 공화정은 공화국을 주제로
한 콩쿨대회를 기획했는데, 끝내 전시회와 시상식은 열리지 못했지만 많은 그림들이 출품되었다. 그중 유명한 것이 오노레 도미에의 그림인데, 붓
터치가 매우 힘차고 예상대로 마리안느는 상의를 벗어 가슴을 드러내고 있다. 상의를 벗은 모습을 그린다는 것은 음란성 여부를 떠나서 동적이고
활달한 인상을 받게끔 했다.(물론 부르주아지들은 이런 모습을 매우 경박하다고 생각했다.) 치마의 길이도
중요했다.
Honoré Victorin Daumier <공화국> 1848년 작
당시 콩쿨출품작중 가장 유명해진 그림이다.
앉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역동성이 느껴지며 젓을 빨고 있는 아이들을 통해 미래에 대한 낙관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들라크루아의 그림은 대단히 역동적이고 급진적인 공화국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러나 들라크루아는 이외에는 별달리
정치적인 성격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이는 다음과 같은 들라크루아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나는 현대적인 주제, 즉 바리 케이트 전(戰)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조국의 승리를 위해 직접 나서지는 못했었지만 그래도
조국을 위해 이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더군다나 2월 혁명 이후 그는 루이 나폴레옹의 제3제정을 지지하게 된다. 이는 그만큼 들라크루아의 정치의식이 조악했음을 의미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또 그러했다. 동시대 사람인 빅토르 위고만 하더라도 왕당파, 자코벵, 사회주의자를 오락가락 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오히려 들라크루아는 공화파라기보다는 대표적인 로맨티스트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초 이후에 발현된 로맨티시즘은 내셔널리즘과
마찬가지로 2차 이데올로기 적인 성격이 강했다. 이케다 리요코의 <베르사유의 장미>를 생각하면 쉬운데, 궁정사회의 화려함 다루고 있는
초반이나, 혁명의 열기를 다루고 있는 후반이나 똑같이 매우 로맨틱하다. <민중을 바리케이트로 이끄는 자유>는 들라크루아의 정치적
성향으로만 보면 매우 이질적인 작품이나 로맨티시즘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전 작품들에서 보여주는 전형성을 담고
있다.

혁명에 대한 낭만주의적 해석을 보고 싶다면 이 책을 읽으라!
다시 원래의 문제제기로 돌아가보자 ‘자유’라는 양반께선 왜 민중을 ‘바리케이트’로 이끌었을까? 바로 7월 혁명기에 가두봉기의
전술로 바리케이트가 처음 등장했기 때문이다. 파리의 좁고 구불구불한 도로사정은 바리케이트를 만들기 적절한 지형조건이었다. 소수의 병력으로도
월등한 무기를 갖춘 왕당파 군대를 막기에 수월했기 때문이다. 이게 얼마나 탁월한 발명이었는지, 170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애용되고 있다.
-.-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은 지배세력이 대로변에서 바리케이트를 사용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7 월 혁명과 2월 혁명 이후로 그놈의 바리케이트에 편집증적 공포를 느꼈던 프랑스의 부르주아지는 파리의 새로운 도시 계획을 구상한다 1853년부터 오스만이 지휘한 파리 개조사업의 핵심은 바리케이트 전이 불가능한 도시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지금과 같은 개선문을 중심으로 하는 12대로가 만들어지고 도시 외관도 깔끔하게 정비되었다. 덕분에 바리케이트 전술은 이전과 같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몰로토프 칵테일이라는 새로운 가두 시위 아이템이 발명된 것은 그로부터 한세기가 지난 1939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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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전에 쓴 글인데, 게시판 테스트용으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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