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정파문제등 여러가지 글을 쓸 생각이었는데, 몸이 좋지 않아서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대신 재미로 번역하는 글이 있어 올려둡니다. <20세기 일본의 사회민주주의와 리버럴리즘>이라는 글입니다. 저자인 야기 키이치로오는 교토대학(京都大学) 경제학부 교수로서 맑스주의경제학과 진화경제학을 연구하는 학자입니다. 1947년 생이니, 한국 나이로는 60이 넘었군요.(사실 야기 키이치로오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냥 우연히 손에 들어와서 번역했을 뿐입니다.) 참고로 컴퓨터에 일어 인식이 설정되어 있지 않으면 괄호에 있는 한자의 상당수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나중에 최종작업을 하면서 모두 한국식 한자로 바꾸도록 하겠습니다(언제 할지는 모름). 번역은 의역과 직역을 닥치는대로 섞어서 했습니다. 문장이 난삽해도 대강의 의미와 흐름을 모두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인물은 사진을 좀 찾아 넣었습니다.만사가 귀찮은 귀차니스트인지라 특별한 일이 아니면 수정할 일은 별로 없을 듯 합니다.(제 일어 실력은 원래 체계도 없고 엉망입니다. 이 점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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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일본의 사회민주주의와 리버럴리즘

야기 키이치로오 (八木紀一郎 교토대학)


사회민주주의의 3시기

일본 사회민주주의의 원류를 찾아보면, 1901년(메이지 34년)에 결성된 사회민주당으로 거슬러 가게 된다. 이 정당은 불과 6명으로 결성되었다. 이들은 곧바로 정부에 의해 해산 당했지만, 훗날 사회주의운동과 민주주의운동(다이쇼 데모크라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결합하는 사회민주주의 사상은 19세기말 서구에서 생겨나 여러 가지 정치운동의 성립을 도왔다. 그러나 이 시기는 사회민주주의의 성립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뒤, 러시아 혁명을 승리로 이끈 레닌주의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의 안에서도 대립적인 흐름들이 생겨났다. 전위정당과 소비에트 권력에 의한 계급독재를 실현하는 것이, 서구의 민주주의 이해에 배반하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 ‘사회민주주의’는 비공산당계의 사회주의자, 다시 말해 의회제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사회주의자의 호칭이며, 이들의 분열은 20세기말까지 계속되었다.

일본 사회민주주의의 원류가 이 분열기[역주: 러시아혁명 이후]보다 앞선 시기로 소급하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장기간에 걸친 대립 속에서 형성된 통념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이며 오늘날과 관련되어있는 장기적인 시점에서 총괄[역주: 사후평가]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오늘날 이 시기의 대립은 실질적으로 해소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대부분의 사회주의정당이 리버럴한 민주제(권력분립과 의회제)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간산업의 국유화와 계획경제라는 사회주의 경제 프로그램 또한 대부분 포기하게 되었다. 따라서 장기간에 걸친 분열과 대립을 지나 사회주의가 리버럴한 민주제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라는 여건 속에서, 그 사상이 얼마나 현실의 정책과 사회운동에 공헌하는 지를 묻게 된다.

제3기의 이런 전환을 소련과 동구권의 사회주의체제 붕괴라는 외부 요인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동안 ‘부르주아민주주의’라고 불렀던 의회제민주주의와 오로지 ‘자본주의’로 해석했던 시장경제에 대한 재평가가, 제2기를 지나면서 진행되어 제3기를 준비하게 된 것이다. 제2기, 특히 후반에 사회주의는 사상과 정치의 양면에서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중시하는 자유주의(리버럴리즘)와의 대결이 되었다. 소련 사회주의의 붕괴와 함께 좌익의 분열과 대립이 소멸되어 사회주의에서 미해결과제로 보였던 것은, 오히려 이 자유주의와의 제휴가 아닌, 화해라는 문제일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일본 사회민주주의의 한 세기를 생각해보자.

최초의 사회민주당

1901년 사회민주당의 결성을 주도한 것은, 결성준비회의 대표였던 아베 이소오(安部磯雄 1865~1949)였다. 아베는 도지샤대학(역주: 도지샤대학은 기독교재단이다) 재학시기에 열렬한 크리스챤이 되어, 미국에서 사회사업을 배우고, 귀국후인 1899년에 와세다 대학(정식 이름은 토오쿄오 전문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사회사업을 통해 사회주의로 다가갔던 아베는, 독일에서도 머무르게 되어, 의회에 진출한 사회민주당의 활동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맑스주의의 유물론을 받아들이지는 않았고, 그 사상은 평생, 기독교적 휴머니즘이었다. 당원 중에서는 후에 코멘테른의 집행위원이 된 카타야마 센(片山潜1859-1933)과 대역사건으로 사형당한 코오토쿠 슈스이(幸徳秋水 1871-1911)도 있지만, 카타야마는 맑스주의자는 아니었고, 코오토쿠 또한 직접행동주의로 나아갔다. 6명의 당원 가운데 코오토쿠를 제외한 5인(아베, 카타야마, 키노시타 나오에木下尚江、니시카와 코오지로西川光二郎、카와카미 키요시河上清)는 크리스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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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이소오 (安部磯雄 1865年-1949年)

그 <선언문>은 먼저 있던 자유민권운동과의 차이를, ‘경제상의 평등을 기본으로하여 정치상의 평등은 뒤로하고’라는 인식이 깔려있어 ‘정치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해당하는 전력을 경제문제에 쏟아 붓는다’라고 하는 것으로 두었다. 그 위에, 기존의 정당에서 무시되었던 ‘노동자 소작인’등의 ‘다수인민’을 대표로 하는 정당으로서 자신을 위치 지워, ‘만약 간명하게 그 포부를 말하자면 우리당은 세계의 대세로 비추어 경제의 추세를 살피고 순수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에 의해, 빈부의 격차를 타파하여 전세계에 평화주의의 승리를 가져오는 것을 목표로 하여’ 다음의 8개조를 그 ‘이상’으로 내걸었다.

1. 인권 차별정치의 차이에 구애받지 않는 인류는 모두 동포라는 주의를 확장할 것
2. 만국의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먼서 군비를 폐지할 것
3. 계급제도를 폐지할 것.
4. 생산기관으로서 필요한 토지자본을 모두 공유할 것.
5. 철도, 선박, 운하, 교량등 교통기관은 모두 공유할 것.
6. 재산의 분배를 공평하게 할 것.
7. 인민으로 하여금 평등하게 정권을 얻게 할 것.
8. 인민으로 하여금 평등하게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하여, 국가는 모두 교육의 비용을 부담 할 것.

여기서는 경제적인 사회주의와 정치적인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인권, 국가를 넘어선 보편적인 인간주의와 그 구체와로서 평화주의가 깔려있다. 아베, 카타야마, 코오토쿠 등 이질적인 퍼스널리티를 가진 3인이 협동하는 것도, 훗날 갈라서게 되는 것을 생각해보면 매우 드문 일로 생각된다. ‘자유주의’라는 말이 나왔지만, 보편적인 이상으로 자유로운 개인의 협동이라는 의미에서 리버럴리즘은 그렇게 존재했던 것 같다.

당 결성의 금지령이 내려지기 전에, 아베 근처에 어떤 쪽에서 ‘군비의 폐지’ ‘인민의 직접투표’ ‘귀족원폐지’의 3개조를 ‘이상’과 ‘강령’에서 배제한다면 결성을 허가해 줄 것이라는 타진이 있다는 말도 있었다. 여기서는 사회주의 보다도 메이지 국가의 권위주의와 군비주의에 걸려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비록 그것을 배제해도, 야마가타벌(山県閥)을 중심으로 한 세력에게는, ‘사회주의’자체가 막아야 할 위험사상이 될 것은 명확한 것이었다. 사회민주당 금지로부터 몇 년뒤, 카타야마와 코오토쿠는 각각 <我사회주의>와 <사회주의참뜻(神髄)>을 저술하고, 일본의 사상에서 사회주의를 정착시켰다. 또한 아베와 키노시타 나오에 등도 포함하여, 그들의 평화주의는 러일전쟁의 비전론(非戦論)으로 입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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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야마 센 (片山潜 1859年 - 1933年)

그 러나 관헌의 압박에 의해, 코오토쿠는 폭력적 수단을 더 용인하는 급진주의로 기울어갔다. 또한 합법적인 조합운동과 의회활동의 여지를 닫았던 카타야마는 고립되어 미국으로 떠났다. 코오토쿠의 급진주의는 훗날 아나키즘의 직접행동주의로 계승되었지만, 이것도 또한 관동대지진 당시 오오스기 사카에(大杉榮)의 피살로 그 싹이 잘려나가고, 코민테른의 움직임에 의해 1920년대 말 비합법 공산당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맑스주의 안에서도 코민테른의 지도에 복종하는 공산당을 지지하는 것과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쪽으로 분열이 일어나고, 사카이 토시히코(堺利彦), 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 아라하타 칸손(荒畑寒村)등 메이지 시기 이래의 사회주의자 다수는 후자에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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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노농파의 지도적 이론가가 되는 야마카와 히토시 (山川均 1880年 - 1958年)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말기에, 사회주의에 대한 탄압이 완화되어, 합법무산정당이 설립가능하게 되고, 아베 이소오(安部磯雄)등의 온건파 사회주의자들이 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공산계와 비공산당계의 쌍방의 맑스주의자들도, 정치활동의 장을 합법무산정당으로 추구했기 때문에, 1930년대에는 이미, 코민테른 계통 공산주의, 비공산당 맑스주의, 그리고 온건파 사회주의라는 대립적인 3개의 사상조류가 성립되었다.

전전의 사회-자유파의 지식인

다이쇼 말기가 되면서 정치운동과 노동운동에서는, 분열과 대립이 격화되었다. 그러나 눈을 사상계로 돌리면 사회파 리버럴리스트라고 할 수 있는 지식인이 각각 개성을 드러내면서 활동을 개시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지도자였던 요시노 사쿠조오(吉野作造)가 1901년 ‘사회민주당의 정신적 계승자’라고 자인했던 것은 알려져있지만, 사회정책을 연구한 경제학자 중에서도 그러한 사람이 출현하게 되었다.

한 사람은 사회통계학자인 타카노 이와사부로오(高野岩三郎 1871-1949)로서, 노동자의 생활실태조사들을 실시했던 타카노의 가르침을 배운 학생들의 많은 수가 사회운동가로 배출되었다. 타카노는, 토오쿄오제국대학에서 경제학부를 법학부에서 분리 독립 시킨후에, 독지가의 출자에 의한 민간연구소(오오하라사회문제연구소)의 소장이 되어, 그 연구소를 노동문제, 사회문제 연구센터로 만들었다. 그는 맑스주의에도 관심을 보여 모스크바를 방문한 적도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독립되어있었다. 그의 기본적 입장은, 권력적인 수단이 아니라 자주적, 자율적인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에 의해 사회혁명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독일유학 당시의 스승이었던 루요 브렌타노(역주: Lujo Brentano)의 ‘사회자유주의’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라 할수 있다. 1945년 패전 후에, 사회당의 결성에 연결되는, 소위 ‘사회주의 세 원로’의 호소가 일어났을 때, 타카노는 아베 이소오, 카가와 토요히코(賀川豊彦)와 함께 그 한 사람이 되었다.

맑스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하여 자주 비판을 일으킨 후쿠다 토쿠조오(福田徳三 1874-1930)도, ‘사회자유파’의 지식인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오시노와 나란히 다이쇼 데모크라시운동에도 참가했지만, 사회민주주의에 있어서는 계급의 이해에 민주주의를 봉사시키는 것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은 경제적 이해만이 아니라 동시대의 사람들이 생존권을 요구하는 것으로 일어났다고 생각하여, 시민사회에서 계급투쟁은 생존권 인정 위에서 사회정책을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파 리버럴은 이 두 사람에 그치지 않았다. 사회정책론의 계보를 살펴보면, 또 한사람, 맑스주의를 비판하면서 민주적인 사회주의를 설파했던 카와이 에이지로오(河合栄治郎)를 볼 수 있다. 저널리즘에서 찾아보면, <아사히>의 반골 저널리스트, 하세가와 뇨제칸(長谷川如是閑), 또 <동양경제신보>에서 필진을 했던 소일본주의자 이시바시 탄잔(石橋湛山)도 있을 것이다. 사회운동의 발전과 언론의 자유를 평가하고, 그 위에서 정치와 사회경제의 개혁을 생각해냈던 ‘사회자유주의’는 20세기의 일본에서 오히려 주류라고 할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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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일본 총리가 되기도한 이시바시 탄잔(石橋湛山 1884~1973)

번영속의 교조적 사회주의

1945년 이후 일본정치에서는, 1955년에 보수합동과 함께 좌우양파 사회당이 통일하기 까지가 고유의 전후시기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1945년 11월에 결성된 사회당은 일시적으로 정권에 참가했지만, 좌우 양파의 대립이 극에 달하여, 1950년대 초반에는, 조직으로서도 분열상태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보수쪽에서도 혁신쪽에서도 정당이 다수 있었기 때문에, 선거마다 그 변동이 크게 불안정한 시기였다. 그러나 그 뒤에는, 자유민주당이 여당으로,  사회당이 제1야당으로서 대립하는 구도가 안정적으로 계속되어 소위 ‘55년체제’가 성립되고, 이것은 1990년대 초반에 정계개편이 시작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사회당은 공산당과 공명당에 비교해서 적은 당원이 있었지만, 호헌평화주의의 대표로서 1000만명을 넘는 국민의 불만을 흡수하는 정당이 되었다.

그러나, 활동가와 기관직원으로 이루어진 소규모의 핵심부분에서는, 현실 대응보다도 사회주의의 프로그램을 우선하는 강한 경향이 존재했다. 당내 논쟁에서 현실주의가 힘을 얻을 때는 반드시 좌익의 반발(역주: 사요쿠바네 左翼バネ)이 일어나, 1964에 채택되었던 강령적 문서 <일본에서 사회주의로의 길>은 우경화를 억제하는 닻이 되었다. 이 문서는 의회를 통한 권력획득과 자본주의의 내부에서의 개혁을 인정하는 것으로 우파의 열망에 답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본격적인 사회주의로의 이행으로 하는 ‘반독점사회주의혁명’의 1단계로서 자리매김하여, 좌파의 혁명노선을 긍정했다. 당활동을 지지하는 활동가층에서 ‘좌익반발’은 1970년대에는 노농파 맑스주의에 선 사회주의협회라는 ‘당내 당’의 모습이었다. 자주독립을 지향했던 일본공산당이 소련, 중국의 공산당과 소원하게 되면서, 일미안보조약반대, 비무장중립의 외교방침을 주장하는 사회당은 양국의 공산당과의 우호관계를 일관되게 유지했다. 그것은 사회당 내부의 ‘사회주의’의 인식에도 침투되지 않을 수 없었다.

창당 직후 사회당이 자본주의를 거부하여 ‘사회주의를 단행한다’(창당강령)고 선언했던 것은 전후부흥의 방식도 확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선택지로서인 정도의 이해였다. 그러나, 1960년대, 1970년대는 일본 경제의 번영기였다. 이 단계에서 평화적인 이행이라고는 해도,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거의 현실성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소련, 동구형, 혹은 중국형으로 보이는 사회주의상이 당내에 지배적인 경향으로 되었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세계전제에서 자유자본주의체제와 사회주의체제가 대립하고 있다는 세계인식에 기반한다면, 자본주의나라의 사회주의야당이 후자에 친근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자민당은 자주 그러한 ‘체제선택’의 선거라고 하는 인상을 만들어내서 선거전략을 펼쳤다. 물론, 사회당이 부르짖던 안보조약의 파기, 비무장중립정책의 실시는, 소련, 중국을 군사, 외교면에서 유리하게 했다. 그러나 사회당 쪽에서는 적어도 사회주의로의 평화이행이라는 ‘선택’을 선거에서 국민들에게 강요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번영기의 교조적사회주의라는 패러독스는 국내정치적인 원인을 고려해야 한다.

정치학자들은, 대체로 두 개의 이유를 들고 있다. 첫 번째는 국정과 지역 차원의 야당간 경쟁이었다. 중의원에서 한번에 3~5명의 당선자를 선출하는 중선거구제에서는, 사회당이 2~3명의 당선을 목표로 하지 않는 한 자민당과의 경합관계는 실제로는 격렬하지 않았다. 특히 농촌적인 색채가 강한 지방에서는, 사회적인 지지기반이라는 점에서도 자민당과 사회당의 경합관계가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시주민층에서는, 사회당은 공명당과 공산당의 진출이 현저했다. 그럼에도 사회당의 지지기반의 중추인 노동조합내부에서도, 1960년대 이후, 정당 지지를 둘러싸고 공산당원과 격렬한 논쟁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타당과는 구별되는 명확한 이상과 전망(즉 이데올로기)를 중견, 젊은 활동가들이 필요로 했다는 것이 그 해석이다. 두 번째는, 노동운동의 대립이다. 전후의 노동조합운동은, 산별 붕괴 후 성장한 총평과 동맹(전노)라는 두 개의 전국조직이 경합하고, 각각 사회당과 민사당과 블록을 형성했다. 민간기업의 다수가 쟁의와 경영측의 움직임에 의해 조합이 분열되고, 그 과정에서 총평계의 조합과 동맹계의 조합이 직접 대치했다. 따라서 노동운동에 의한 대립이 그대로 정당 수준의 대립으로 옮겨가고, 양당의 협동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총평은 임금투쟁을 같은 시기에 일제히 벌이고, 그 과정에서 형성된 높은 임금을 모든 산업에 파급시키는 춘투방식을 고집했지만, 오일쇼크 이후에는 그런 방식의 유효성은 떨어졌다. 감량경영과 산업재편에 직면하여, 기업경영과 산업정책에 관심을 가진 민간의 노조와 단일산별노조가 총평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총평계 노동운동은 공공부문의 노동조합으로 경도되어가면서, 그만큼 경제투쟁보다는 정치투쟁의 비중이 높아져갔다. 이렇게 노동운동의 분열이 정치의 대립으로 연결되고, 정치투쟁의 성격이 강한 노동운동 속에서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유지되었다는 것이 두 번째의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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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노몬의 공제 회관에서 열린 춘계 임금인상 공투총궐기 대회, 1955년 1월 28일 도쿄·미나토구

위세서 제시된 해석이 맞다면, 사회당 내부의 사회주의의 경직화는, 공산당과의 이데올로기적 경쟁이 불필요한 것으로 된다. 또한 노동운동의 분열이 극복될 때까지는 해결되지 않는다. 좌익교조주의에서 결별한 방침도, 공산당과의 혁신동동투쟁을 취할지, 혹은 공명당, 민사당과의 혁신중도연합을 취할지의 선택이 흔들리고 있을 때에는 결정할 수가 없었다. 1970년대에는 ‘길’의 재검토를 하는 것이 결정되었지만, 이것이 최종적인 결정을 본 것은 ‘길’을 대신한 문서인 <신선언>이 채택되었던 1986년이었다. 또한 후자의 문제가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던 것은 전민노협을 축으로 전일본민간노조연합이 결정되어, 노동전선의 통일이 실현된 1980년대 후반의 일이었다.

사회주의와 시민운동의 만남

사회당 내부에서 교조적인 사회주의에 반대하여, 전환을 시도한 대표적인 인물은 에다 시부로(江田三郎 1907~1977) 였다. 그도 원래는 좌파출신이었지만, 당의 국민운동을 담당하면서, 정책을 당내 취향보다는 대중적 방향으로 어필하는 감각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사누마(浅沼) 위원장의 피살 이후 위원장대행으로 취임한 에다는 1961년에 국민의 이익을 실현하면서 생산관계를 부분적으로 변혁한다는 ‘구조개혁’의 노선을 주장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혁명노선에 대립하는 새로운 이론이라고 불린다. 뒤이어 1962년의 서기장 재임시에는, ‘높은 미국의 생활수준’ ‘소련의 철저한 사회보장’ ‘영국의 의회민주주의’를 추구목표로 하는 ‘에다비젼’을 제기했지만, 이 해의 대회에서 이 비젼을 비판하는 결의가 채택되었기 때문에 서기장을 사임했다. 다시 서기장이 된 1970년에는 ‘다양한 가치관’과 ‘자치와 참여’를 중시한 ‘신 에다비젼’을 제기했지만, 이때도 당의 대세를 움직이지 못하고 이 해 당대회에서 위원장 선거에 패배, 당의 집행부로부터 멀어졌다. 당내 야당의 입장에 서게 된 에다는, 공명당, 민사당과 함께 중도개혁세력의 결집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일본을 생각하는 모임’에 참여했지만, 이것이 좌파, 특히 사회주의협회계에서 격렬한 공격을 받아 1977년 3월에 사회당을 탈당했다.
탈당한 에다가 향한 곳은 기존의 정당은 아니었다. 그는 탈당후 며칠뒤에 토오쿄오 서부에서 시민운동 활동을 하는 그룹과 공개토론회에 나가서 이 그룹의 리더인 칸 나오토(菅直人)와 손을 잡고, ‘사회시민연합’이라는 정당을 조직하는데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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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10월 12일 토오쿄오, 하비야 홀에서 사회당 당수 아사누마 이네지로가 미일 안보동맹을 반대하는 연설을 하는 도중 살해되었다. 1961년 퓰리처상 수상으로 더욱 유명해진 사진.

이 공개토론회 자리에서, 시민운동 그룹이 에다에게 물었던 것은 다음의 세가지였다. 1) 노동조합과의 관계. 2) 생활인의 정당이 노동자의 정당인가. 3)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 이 세 항목이었다. 이것은 에다가 박차고 나온 사회당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새로운 정당의 성격을 둘러싼 토론이었다. 에다는 시민 그룹의 노동조합에 대한 의존, 종속에 대한 비판을 받아들였지만, 노동조합도 생활문제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가야하며, 또 노동조합과 정당의 대등한 협력관계는 거부해야 할 것이 아니라고 답했다. 에다는 또한, 그가 ‘사회주의’라고 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는 세대인 것을 인정했지만, 그것을 ‘정언명령에 의해 지도되는 운동이 아닌, 궁극의 목표로서, 현실의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는 사회운동’이라고 해석한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양자는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기존의 정당에서 무시되어왔던, 도시민을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에 합의했다. 또한 멤버 개인으로서 의사결정을 존중하는 수평적인 당구조를 구축하는 것으로도 합의가 성립했다. 이 토론회에 참가했던 정치학자인 시노하라 하지메(篠原一)는, 이것은 ‘1955년 체제의 붕괴를 촉진하는 큰 계기’로서, ‘정당정치의 자유화’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는 인상을 적었다.

에다는 이 회합에서 ‘사회시민연합’을 발족한 후에 급사했다. 에다의 취지는 재판관이었던 아들 에다 사츠키(江田五月)와 에다에게 속한 사회당 이탈파 의원들에게 계승되어, 당명도 ‘사회민주연합’으로 변경되었다. 약소한 조직이기 때문에 사회당을 시작으로 기존 정당의 압력을 받은 이 새로운 정당은, 17년간 존속되었지만, 큰 선장을 이룰 수는 없었다. 에다에 속한 사회당 탈당파 의원의 선거구에서 다수는 지방이었다. 전 뉴스 캐스터인 덴 히데오(田英夫)와 같이 도시에서 득표 가능한 의원도 있었지만, 도시선거구에서의 충실한 활동에 의해 당선될 수 있던 것은 칸 나오토 뿐이었다. 짓궂은 견해로 보면, 이 정당의 가장 큰 정치적 공헌은 칸 나오토라는 시민운동가에게 의원의 길을 열어준 것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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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다 시부로 (江田三郎 1907~1977)

정세확장에 좌절한 뒤 시민련은, 인권문제와 도시문제등의 영역을 빼고는, 야당 사이의 균형이라는 소극적인 역할밖에 할 수 없었다. 한때는 신자유클럽과 원내에서 공동회파를 결성했지만, 신자유클럽의 의원이 자민당에 복당하면서, 이 제휴는 어떤 적극적인 결과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끝났다. 그러나 그 뒤에 사민련도 사회당의 자기혁신을 향한 움직임을 외부로부터 촉진시켰다는 의미에서는 일본사회민주주의에 공헌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개의 전략

에다의 탈당으로 시작된 1980년 정후의 사회당내외의 변화를 규정하는 것은 한편에서는 기존의 사회주의운동, 노동운동의 외부에 시민운동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다른 쪽에서는 유력노조를 중심으로 구체적인 제도, 정책을 실현가능한 현실주의적인 정당으로 거듭날 것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는 시민운동과 제휴하는 것으로 소위 ‘시민연합’전략과 노동조합과 제휴한 현실주의적인 정책을 실현하는 체제를 구축하는 것으로 이른바 ‘사회코포라티즘’전략이라는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탈당 전에 에다는, 노동전선 통일의 기대도 표명하고, 또 공명당, 민사당과의 제휴를 추진하면서 반드시 사회코포라티즘 전략을 부정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에다와 시민그룹의 공개토론회에서도, 시민그룹은 시민참여의 정치를 노동운동에서 독립해 창출하는 것을 지향했지만, 에다는 노동운동도 시민생활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양자는 반드시 배반하는 것은 아니지만, 항상 병행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코포라티즘이라는 것은 사회층, 지역, 직업 또는 산업마다 조직된 단체가 정책의 형성과 집행에 실질적인 형태로 참가해, 국가도 그에 조응하여 조직되는 것을 가리킨다. 파시스트국가에 의한 의회제도에서 채택한 국가형태로서 조직된 코포라티즘이었지만, 의회제도를 보완 또는 그것과 병행하는 형태로 코포라티즘이 성립되기도 한 것이다. 그 가운데, 노동운동의 조직(노조 등)의 참여가 큰 역할을 가져오는 경우 ‘사회코포라티즘’으로 불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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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나오토(1946~) 일본 시민운동이 낳은 거물정치인

이런 형태의 코포라티즘은, 노동단체와 경영자단체와의 협의, 교섭과 정부기관과 심의회의 노동단체의 참가등의 형태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직접적인 것은 노동운동과 제휴하는 정당이 정권에 참가하는 경우다. 북유럽과 독인처럼 강력한 노동운동과 사회민주주의정당이 함께 존재하는 나라들이 그 전형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사회코포라티즘’은 자본주의적인 기업과 산업의 원칙적 긍정위에 성립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처럼 노동운동이 기본적으로 기업단위로 조직된 경우에는 이런 지향은 노동자의 기업으로의 통합을 승인하고, 노동운동의 대항적 성격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1970년대의 일본에 있어서 ‘사회코포라티즘’의 지향이 나타나면서, 이것이 총평의 유력 단위 산업에 까지 침투되었던 것은, 석유위기의 ‘감량경영’과 산업구조의 전환 속에서 민간기업 노동자의 관심이 고용으로 향하고, 공기업 노동자들도 보험과 연금등 제도요구가 중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총평은 제도요구를 내걸고 ‘국민춘투’에 임했지만, 정부를 움직일 정도의 투쟁 체제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이상, 노동 단체의 분열을 없애고 정책 형성에 함께 참가하는 것을 목표하는 방침으로 전환했다.

노동운동에서 ‘전선통일’을 기초로 하는 ‘사회코포라티즘’전략은 확실히 노동자 중심의 정책 모델이었지만, 보편적인 ‘복지국가’의 실현을 목표로 내걸었던 것 보다도 그 한계가 뚜렷한 것이었다. 그 정치 단계의 표현이 사회당, 민주당에 더하여 공명당이 들어간 ‘사공민’이었던 것은 그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전략모델에 내재적인 문제는, 기업, 산업, 계층의 특정이해를 벗어나는 것이 곤란했고, 단체가 개인의 의사와 이해를 대변-대행한다는 것이었다. 단체의 구성원을 위해서 활동하지만, 구성원의 자발적, 창조적 활동을 해방하지 않는 경우에는, 단체자체의 기초에 의한 에너지를 잃고, 단체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

고용노동이라는 자본주의의 실현에서 출발하는 코포라티즘 전략이 기존의 기업, 산업의 가본주의적 성격을 승인하는 것에 대하여, 노동에서 출발하지 않는 ‘시민사회’전략쪽은, 기업, 산업의 성경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호헌평화 운동은 기업, 산업에서는 직접 걸려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배출된 시민운동은, 공해문제, 핵발전소문제, 더욱이 소비자문제에 대해서 기존 체제 속에서 기업, 산업의 존속에 관련한 요구를 지속적으로 펼쳐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포라티즘을 지향하는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은, 시민운동의 침투에 대해서 자주 경계했다. 기업, 산업에 관련되지 않은 평화문제와 안보문제에서도, 일미안보체제를 명확하게 긍정하는 민사당, 동맹계의 노동운동과 긴장을 가져오게 되므로 환영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코포라티즘 전략은 시민운동에게 방파제가 되었다. 노동조합원 중에서도 정당지지에서는 무당파층과 자민당 지지층이 증가한다는 이야기로, 노동운동의 전환과 함께 노동자의 비정치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시민사회’형태의 전략은, 1989년 참의원선거에서, 호헌평화주의의 도이 타카코(土井たか子)위원장을 추대하여 소비세의 도입의 반발을 흡수하는 것에 성공했다. 도이 위원장 시대에 사회당은 많은 여성의원과 시민운동가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급조된 의원의 상당수는 정책 논쟁에 참가할 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았고, 또한 중진의원과 유력노조지도자가 추진하는 방침전환에 대응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다. 사회당 우파는, 안보정책의 전환을 일으키기 위해 도이를 위원장으로 추대했지만, 노선 전환 후의 선거에서 패배한 뒤 신당운동으로 경도되었다. 사회당은 새로운 사회민주당의 지휘봉을 다시 도이에게 주었다. 사회당을 시민운동과 결합시켜 대생시킨다는 전략의 결과가 현재의 약소한 사회민주당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실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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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 타카코(土井たか子 1928~) 80년대 후반 도이 열풍을 일으키며 55년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편, 그 해에 연합을 발족시켜 현실의 체제를 정비한다는 코포라티즘의 전략 쪽은 어떠했을까. 노동법제의 개혁의 측에서 보자면, 경영측의 저항을 물리치고 40시간 노동제의 전면적용을 실현하는 성과를 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새로운 재량노동제(역주. 실제근무시간과 상관없이 정해진 급여를 받는 것)의 도입, 노동자파견적용업무 규제완화(네거티브리스트化)에 대해서도, 일정한 제동을 거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두 가지에 이르는 과정은 그 자체가 기존의 코포라티즘적 조정기관(중앙기준심의회)를 넘어선 수준(행정혁신과 규제완화)에서 내려진 것으로서, 노동측은 그것에 부분적인 저항을 시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정책의 형성, 실현과정에서 노동측의 참가는, 나라 전체의 정책의 내용과 결정구조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규제완화와 함께, 그 영향이 가능한 범위도 더욱 좁아지고 있었다.

삼각 구조에 의한 정리

이 글의 첫부분에서, 일본의 사회민주주의의 과정은,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만이 아니라 제3의 기초인 자유주의의 통합에 있다고 문제를 설정했다. 마지막으로 이제까지
개략적으로 전후의 일본 사회민주주의와 70년대 후반 이후 두 개의 전략에 대해서, 이 시각에서 정리를 시도 할 것이다.

나는 우선, 자유주의(리버럴리즘)는 그 핵심에 있어서 개인의 ‘시민적자유’(자기의 사회 활동, 그리고 자신에 속하는 자산에 관한 자기결정)을 중시하는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정치, 경제, 사회라고 하는 세 영역에서 구체화된다. 정치면에서는 오로지 전제적 권력행사의 법에 브레이크를 거는 소극적인 자유주의도 있지만, 정치생활로 독립된 개인의 적극적 참여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적극적인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최근에 ‘시민공화주의’의 논의를 받아들여, 나는 시민적 자유주의라고 부르고자 한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영업의 자유’의 법리를 가능한 중시하는 것으로서, 시민경제와 그것의 영리활동(즉, 자본주의)를 긍정한다. 다만, ‘독점’과 ‘시장의 실패’의 대응의 방법에 대해서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생활양식과 사회관계에서 개인의 자유로운 선책을 중시하는  사회적 자유주의에 있다. 사회적인 가치규범에서 일탈을 조장하는 것으로, 자주 보수파로부터 공격받았던 ‘리버럴럴’ 혹은 ‘리버럴리즘’은 대부분의 경우, 이 사회적 영역의 자유주의인 것이다. [그림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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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자유주의의 삼각개념]


여기서 세영역으로 구체화된 자유주의는 반드시 모두 같추어진 형태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일정한 기간이라면, 경제적 자유주의가 칠레의 피노체트정권에 의한 전제적 정부 체제에서 도입되었던 것도 있고, 또한 현대의 네오리버럴리즘에서 보여지는 것으로 원칙주의적인 경제적 자유주의자가 사회적 자유주의를 경쟁 저해적인 약자 보호로 간주하고 반감을 가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세영역에서는 ‘시민적 자유’의 실현이 각각 서로를 서로 지지하는 것 사실이며, 자유주의 본래의 강점은 그 점에 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정치, 경제, 사회의 세영역을 1970년대에 시작되었던 전환보다 이전의 전후 사회주의사상에 비추어 보자면, 그림2를 참고하기 바란다. 우선 핵심에는 자본주의의 본질은 노동자계급의 이해라는 관념이 있다. 그것은 정치면에서는, 그 이해를 지키려 투쟁하는 노동조직, 그 이해를 대표하는 정당의 지도라는 표현을 취한다. 경제면에서는 그 강약, 범위에 있어서 차이는 있지만, 계획화가 요구된다. 마지막으로 생활양식면에서는 일 중심의 가족과 사회생활, 집단주의에 의한 개성의 억압이라는 현상이 보여진다. 이것은 ‘산업주의’적인 가치관이 드러나는 것으로 말 할수 있다. 이 지도-계획경제-산업주의라는 삼각형은, 자유주의의 삼각모델과는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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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1955년 체제의 사회주의 사상]


이것에 비해, 70년대 후반 이후의 두 개의 전략은 어떠한지 그림을 보자. 자본주의의 본질인 고용관계에서 출발하는 ‘사회코포라티즘’전략은 경제적 자유주의를 상당히 수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면과 사회면에서는 자유주의는 어떤 것일까. 또한 핵심에 있는 사상자체에서도 고전적 사회주의의 ‘노동자계급모델’과 어떠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조직영역에서 노동자와 그 이해의 대변하는 것은 당연히 승인되어 있지만, 계급이 사회운동의 기초라는 능동적인 계급관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즉, 핵심에 있는 것은 ‘노동자의 이해’이고, 그것을 대변하기 위해 대행적인 참가를 하게되는 것이 확실히 ‘코포라티즘’이다. 사회적인 영역에서는, 1980년대까지는 이 전략은 보험, 연금등의 사회보장제도가 충실한 ‘복지국가’를 목표로하는 것으로서, ‘국민’전체를 포함하는 전약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것에 대응하여, 경제적인 면에서는 순수한 자본주의가 아니라, 혼합경제적 요소가 첨가되어있는 것이다. [그림 3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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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사회코포라티즘 전략]


마지막으로, 시민사회와 그로 인해 성립하는 운동과 결합한 ‘시민사회’전략이 있다. 공동체 활동에서 공해문제, 게다가 평화운동에까지 확대되는 이 전략의 핵을 짚어내는 것은 쉽지 않지만, 나는 사회구성원으로서 시민의 ‘생존권’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사회구성원으로 된다는 것은, 자본주의적 고용관계도 계급적출신도 아니다. 그것은 사회 그 자체 속의 인격적 승인과 그 실질화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략에서, 사회영역은 이미 2차적인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생활의 선택의 일반적 확대라는 것만이 아니라, 여성, 고령자, 장애인, 외국인, 그 외 다양한 인격의 어떤 쪽도 인정하고, 그 사회참여의 능력을 증진시키는 것을 목표라 할 수 있다. 생활로의 경제적 영역에 대해서는, 이 전략은 자본주의적 영리경제 그 자체로는 반대하지 않는다. 정치면에서는 반드리 고정적인 조직정당에 의존하지 않는 참여민주주의를 목표로 하는 것 같다. 경우에 따라서는 과정마다 임의적인 정치참여가 일어나는 지도 알 수 없다. 사회영역에서 승인과 능력증진, 경제영역에서 비영리적 활동과도 더불어 권력적이지 않은 시민적인 거버넌스를 실현하는 것이, 이 전략의 정치면의 표현인 것 같다. ‘시민사회’전략은 그 자체로서는, 결과와 상채로서 평등을 창출해내지는 못한다. 그러나 불리한 조건에 있는 사람들의 생존권을 승인라고, 사회참여의 능력을 증진(empowerment)하는 것은, 사회주의의 기초인 공정과 연대라는 가치와 합치되는 것 같다.[그림 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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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4  시민사회전략]


사회-자유주의의 전망

이렇게 정리해보면, 1970년대말 이후 두 개의 전략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리버럴리즘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침투의 소산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앞에서 서술했던 사회민주주의의 제2기에서 해결되지 못한 과제였다.

1990년대 정계개편 시기에서는, ‘사회민주주의’에 의한 ‘제3극(極)’의 형성이 이야기되거나, ‘시민, 리버럴 결집’이 이야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구 사회당 의원 다수가 입당했던 민주당은, 하토야마 유키오(鳩山悠紀夫)에 의해 원래는 자민당에 소속된 정치가에 의해, 구 사회당과 조직적 계승관계로 결성되었다. ‘시민’이라는 말은 커녕, ‘리버럴’이라는 호칭도 언젠가부터 사라져, 오로지 정권교체의 도구적 의미만이 강조되었다. 그중에서 중의원 선거를 보류한 2003년 5월에 오자와 이치로오(小沢一郎)의 자유당이 해산하여, 민주당에 참가하게 되었다. 11월에 실시된 선거에서는, 민주당은 중의원 200명이라는 목표의석을 달성할 수는 없었다고는 해도, 의원수는 꽤 늘어나게 되어, 2대 정당의 체제를 정돈했다. 이런 발전은, ‘사회민주주의’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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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와 이치로오(小沢一郎 1942~) 가네마루 신은 “평시의 하다, 난세의 오자와, 대난세의 가지야마”라고 평했다.

사회당이 1980년대에 이미 리버럴화 되었다면, 소선거구제에서 야당결집의 요소가 될 수 있었다고 상상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낡은 가죽에 새로운 술을 붓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다. 사회당은 안보조약과 자위대를 승인하는 것으로 현실타협에 지나지 않는 전환에 정력을 쏟아, ‘시민사회’전략이든, ‘사회코포라티즘’전략이든, 그것을 정책적으로 구체과하여 실행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북조선이 일본인 납치를 인정함으로서 도이 타카코의 사회민주당이 고난의 길로 갔듯이, 과거의 부채가 지니는 무게란 매우 큰 것이다.

코이즈미 준이치로(小泉 純一郎)의 강점은 ‘자민당’(실제로는 다케시타파가 만들어낸 이익유도정치)을 ‘부순다’고 불린 ‘구조개혁’=이권폐지뿐만이 아니다. 독특한 개인주의(変人)와 대화형의 포즈에 의해 사회적 리버럴리즘의 영역마저 침투했던 것에 있을 것이다. 사회면에 민감한 여성의 지지가 높은 것이 이를 증명해준다. 한편, 칸 나오토도 오자와도, 자민당형의 이익 유도 정치에 반대해 온 정치가이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자유주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자와의 자유주의는 일종의 시민적 책임 의식을 강조하는 것으로, 자유방임형의 네오·리버럴리즘은 아니다. 그에 대한 시민운동 출신자로서 사회적인 리버럴리즘을 지향하고 있는 칸 나오토는, 경제에서 여성이나 고령자도 자립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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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준이치로오(1942~) "나는 괴짜라고 불리지만 괴짜라는 것은 변혁하는 사람이다."

자민당의 실태는 논외로 하더라도, 여당과 아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리버럴리즘이 표면으로 나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를 계승한 요소는 상세히 보고가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산업의 사회화’와 계획경제라는, 누가 보아도 명확한 제도가 아니라, ‘공정’과 ‘연대’에서 보이듯이 표현의 모습을 변화시킨 것이 많다. 그러나 사회주의, 혹은 사회민주주의가 실체적인 제도로서 없어지면 그 만큼 정책의 구체화와 현실의 방법이 문제가 될 것이다.

정책의 구체화와 실현의 방법과 관련하여 확인해 두어야 할 것은, 70년대 말 이후 두 전략의 명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20세기말, 즉 글의 앞부분에서 말한 사회민주주의 제2기의 ‘사회 협조 국가주의’ 전략은 분명히 규제완화의 흐름에 의해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노동운동의 조직률이나 조직내부에서도 참여도가 떨어지고 있다는 고민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업 내부의 불공정 시정과 노동법제의 이해 조정 등에서는, 이 전략에 의거한 참가 체제가 유효하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또 ‘시민사회’ 전략은 사회적 리버럴리즘을 인격적승인과 능력증진으로 이어져 구체화하는 시점을 던져줄 것이다. ‘시민사회’전략의 문제점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요구나 구체화되지 않은 사상에 의해 운동이 진행하는 것이 많은 것이다. 그 점은 당사자의 이해에 기반을 두는 조직과 전문가가 협동하는 ‘코포라티즘’ 조직은, ‘시민사회’전략을 보충하는 기능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시민사회’전략은, 평등보다 참가, 승인, 능력 증진을 중시하지만, 이것 역시 코포라티즘의 제도에 의해서 적당히 보완될 필요가 있다. 반대로, 코포라티즘의 전략이 ‘대리적 참여’로 나가는 것에 대해, 기초 사회층 자체가 비정치화 되어 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시민사회’전략으로 자율적 활성화를 실현하는 것이, 이를 극복하는 것으로 연결될 것이다.

민주당은, 그자체로서는 ‘사회민주주의’는 아니겠지만, ‘사회-자유’주의의 흐름 속에 들어가있다. 자민당 중에서도, 일부에서는 ‘사회-자유’주의로 무게를 두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정당 없는 양당제가 정착되었음에도, 그중에서 위에서 이야기한 두 개의 전략이 존재했던 ‘사회’적 요소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확장하고 발전해 나갈지가, 일본 사회민주주의 제3기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profile
80년대에 태어나 90년대에 성장해 2000년대를 살고 있다. 사회학을 전공하고 있지만, 스스로를 역사학도라고 생각한다. 면식과 만화, 수다와 어린이를 좋아한다. 홈페이지 : http://solid.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