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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말에 집에 내려갔다 온 관계로 미디어법에 대한 헌재의 판결의 자세한 내용을 세세히 살펴보지는 못하던 차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 뒤늦게 판결과 반응들을 살펴보게 되었다. 우선 명확하게 해야 할 점은, 헌재의 이번 결정에 대해 권력에 의해 헌재가 장악되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초점이 맞지 않는 비판일 뿐더러 검증할 수도 없다는 점이다. 헌재의 9명의 재판관은 대통령, 국회, 대법원장이 각각 3명씩 임명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현재 헌재 구성원들의 임명시기는 9명 모두 2005년에서 2007년도에 걸쳐있으며, 이는 노무현 정부 시기이다(링크 참조).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 본인에 의해 임명되었던 이강국, 김희옥, 송두환 재판관의 판결 내용마저도 일관된 경향성을 보이고 있지 못하다(물론 다른 재판관들에 비하면 다소 다른 입장들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헌재를 2MB 의 꼭두각시 쯤으로 파악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최근의 논란과는 달리 한국 민주주의에 있어 중요한 문제는 미디어법에 대한 판결 내용 자체라기 보다는 소위 '제왕적 사법부' 에 대한 문제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규정하고 있는 매디슨적 민주주의(Madisonian Democracy)에 의해 규정되어 있으며, 이는 민중의 열정적 에너지와 인민주권을 강조하는 민중적 민주주의(populistic democracy)-대륙적 전통에 기반한-와는 달리 다수의 전제(tyranny of the majority)를 막는 것-영미식 전통에 기반한-을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매디슨적 민주주의에 기반한 한국의 삼권분립 체제에서 사법부는 나머지 두 부서를 수평적으로 견제하는 것을 존재의 이유로 가진다. 하지만 행정부 및 입법부와는 달리 수직적 견제의 원리를 가지지 않는 사법부는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로부터 유리 된 채 삼권 내부의 권력논리에 의해 움직이기 쉽다. 이는 흔히 말하는 행정부에 의한 사법부의 지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법부의 독립적 권력 추구를 말하는 것이다. 2MB 정부의 무도함을 근거로 사법부 장악을 말하는 자들이 간과하는 점은, 2MB 를 가볍게 능가하는 칠레의 피노체트 치하에서도 사법부는 군부 내부의 파벌투쟁에 편승하여 나름의 자율성을 누린 채로 존재하였다는 점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매디슨적 민주주의에 기반한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상원의원의 주별 인원 배분 방식과 대통령 간선제로 인해 인민을 직접적으로 대표하는 기구인 의회의 대표성과 행정부의 대표성이 약화된 상황에서 제왕적 권력을 누리는 것은 사법부가 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두가 익히 아는 부시와 앨 고어가 맞붙은 2000년 대선에서 선거의 결과를 결정지은 것은 인민의 표가 아니라 표를 해석하는 사법부의 판결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한국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어 입법부가 합의하여 내린 결론인 행정수도에 대해 사법부가 나서서 전면무효화 하는 사태와, 비록 스스로의 손으로 사태를 종결시켰음에도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에 대한 탄핵 근거를 마련해주며 그 운명을 결정지은 사태를 통해 그 정점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사법부, 특히 헌재는 민주주의적 절차의 위에서 게임의 규칙을 결정하는 델포이의 신탁, 바티칸의 회칙으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며 제왕적 사법부로 거듭난 것이다. 그리고 아래에 대한 책임성을 가지지 않고 아래로부터의 대표성이 극히 취약한 이들의 판결은 대부분 사회의 상층이익을 대변하는 경향을 가진다. 이번 미디어법에 대한 헌재의 판결이 어떤 권력 편향성을 가진다면, 그것은 이명박 행정부나 한나라당이 장악한 국회에 대한 편항이라기 보다는 항구적으로 한국사회의 상층이익을 대변하고 대표하는 언론자본에 대한 편향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이번 헌재의 미디어법 판결은 미디어법 자체에 대한 위헌심판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규율하는 게임의 법칙에 대한 판결이라고 보아야 한다. 즉, 헌재는 미디어법 자체의 내용을 가지고 판단을 한 것이 아니라 익명의 법률 A가 특정한 절차적 잡음을 내고 통과되었을때, 그 법안을 인정해야 하는가의 여부를 두고 판단을 한 것이다. 법리적 판단이 어쨌든 간에 결과적으로 헌재의 판결은 입법부에서 다수결의 원칙을 재가해준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흥미로운 점은 이는 애초에 매디슨적 민주주의에서 사법부가 존재하는 목적인 다수의 전제에 대한 견제라는 의무를 방기한 결정이라는 점이다. 사실 헌재의 이번 결정에 대하여 일면적인 규범적 판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분명 헌재의 판결은 결과적으로 상층이익과 권력을 차지하는 다수를 지지해주는 판결이지만, 그것은 결과론적 문제이지 헌재의 판결 자체가 가지는 성격은 아니다. 만약 헌재가 미디어법에 대한 무효 판결을 내렸다면 헌재는 소수파의 의정방해 행위인 필리버스터링을 인정해주는 셈이 되는데, 이는 두 가지 문제를 가진다. 첫째, 의회 내에서 자율적으로 형성되어야 할 거버넌스를 외부자인 헌재가 형성해준다는, 제왕적 사법부의 문제(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 법의 기본 역할은 게임의 규칙을 규정해주는 것이지만 의회 내의 쟁의까지 9명의 재판관이 규정한 법에 의하여 규제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스럽다)가 제기되며 둘째, 필리버스터링 행위는 양날의 검이라는 점이다. 만약 좌파 정부가 집권하였을 때 복지정책 등에 대하여 우파가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한다면 그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 공은 다시 의회로 넘어왔다. 이제부터 야당과 시민사회의 역할이 정말로 중요해진다. 헌재의 판결을 놓고 계속 왈가왈부하는 것은 오히려 사회 내에 존재하는 초월적 권위로서의 헌재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꼴이 된다. 집시법 헌법 불합치 결정과 같이 자신들의 정치적 성향에 맞는 판결이 내려진 경우에는 헌재의 결정을 델포이의 신탁으로 축성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성향에 맞지 않는 판결이 나왔을 때에는 카산드라의 예언처럼 내팽개치는 것은 역설적으로 누구에게도 책임지지 않는 헌재의 독립성과 그들의 정치성을 강화시켜줄 뿐이다. 성경의 자구 해석을 놓고 다투던 중세의 신학 논쟁과 민주주의 정치가 다른 점은 자구에서 초월하여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점이다. 헌재가 자신의 책임을 방기 혹은 현명하게 회피한 것은 헌재 스스로가 제왕적 사법부의 지위에서 잠시 내려와, 역동적인 민중적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는 호기를 마련해준다. 헌재가 특정의 행동지침을 마련해 주지 않은 공간에서 의회와 시민사회는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게임의 규칙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헌재 결정이 내려지기 전 YTN 노조 노종면 위원장이 인터뷰에서 하였던 말은 오히려 헌재의 결정 이후에 더 중요한 것이다. 헌재의 결정은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국민의 의사이다. 물론 자유와 평등이라는 본질적 가치가 침해되는 것을 막는 최후의 보루로서 헌재의 역할은 중요하지만, 나치 시대 법원의 편파적 판결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권력의 변동은 곧 사법부 판결의 변동으로 이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헌재가 민주주의에서 구원투수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다. 민주주의를 민주적으로 만드는 것은 소수의 전문가들에 의해 제시되는 신탁이 아니라 인민 스스로가 역동적으로 만들어나가는 좋은 정치의 힘이며, 지금은 신탁을 붙들기보다는 정치를 회복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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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너머에 있는 실재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