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파의 신질서(新秩序)



 지난 22일, 대리투표 의혹과 재투표 논란으로 점철된 파행적 절차를 거쳐 신문법 ․ 방송법 ․ IPTV법(이하 미디어법)과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각 법안들이 야기할 현상에 대한 분석은 이미 충분히 나와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개별 법안들의 효과보다는 전체적 맥락을 위주로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현재 절차상의 문제에 대한 논의 역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한나라당이 절차상의 문제를 감수하면서까지 법안을 강행한 동기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통과 과정에서의 절차적 논란을 무시한다 하더라도, 위의 법안들은 민주개혁 ․ 진보세력이라 불리는 정당들을 배제한 채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에 의해 통과되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물론 전면적 거부로 일관하는 태도를 보인 민주당에 대해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톨릭을 국교(國敎)로 지정하자는 논의를 제기해놓고 반대당이 개신교나 불교라는 협상안을 제기하지 않고 국교 지정 논의 자체에 반대했다고 해서 무작정 비난하기는 힘들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한나라당이 미디어법과 관련하여 절충가능성을 전제로 하여 진지하게 합의에 나선 것은 박근혜 의원에 한해서이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한다.

 첫 번째, 한나라당으로 대표되는 우파 세력은 더 이상 자신들의 스펙트럼 밖에 존재하는 세력을 협상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다. 우파 세력에 이론적 배경을 제공하고 최신 담론을 주도하는 뉴라이트 세력의 발언-대한민국을 긍정하는 세력과만 소통이 가능하다-은 우파 세력의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는 탄핵 역풍으로 인해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고도 보수 세력의 압력을 신경 쓰며 자신들이 내세운 4대 개혁안건 조차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누더기 법안으로 만들어버린 민주개혁 세력과 대조적인 태도이다. 민주개혁 세력 역시 좌파세력을 배제한 채 우파 세력과의 야합을 추구하였지만, 중요한 것은 민주개혁 세력과 한나라당으로 대표되는 정통 우파 세력의 서로에 대한 태도의 차이이다. 민주개혁 세력은 정통 우파 세력을 밉지만 회유할 상대로 본 반면에 정통 우파 세력은 민주개혁 세력에 대한 총체적 불신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우파 세력의 민주개혁 세력에 대한 시선은 민주개혁 세력이 좌파 세력에 대해 보이는 시선과 유사하다. 이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것은, 협애한 이념지형 내에서 극한의 이념대립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하더라도 민주개혁 세력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비교적 넓은 반면 우파 세력의 스펙트럼은 협소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파 세력의 협소함이 아니라 민주개혁 세력의 무원칙함이다. 정치에 있어서 세력구분은 본질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으며, 민주개혁 세력은 자신들의 ‘적’ 으로 우파보다는 좌파를 선택하였다. 좌파 세력에 대하여 교조적이라는 낙인을 찍고 현실주의와 실용주의를 내세운 민주개혁 세력의 위선은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또한 이번 사태를 통하여 반대여론을 무시한 채 국민의 35%만을 대표하는 정치를 하겠다는 우파 세력의 본색 역시 드러난다.

 두 번째, 우파 세력은 소극적 반대에 머물던 과거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국가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수행할 능력과 의지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점차 급진화 되고 있다. 참여정부 말기부터 두드러진 우파의 혁신(물론 이는 본질적으로 냉전반공이념의 논리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과 재정렬은 이러한 흐름의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산업화의 시대에 갇힌 구 보수 세력을 비판하며 야심차게 등장한 뉴라이트 세력은 선진화의 기치를 내새워 기존의 산업화 담론을 대체할 수 있는 우파의 새로운 국가 비전을 제시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구 보수 세력의 산업화 담론이 자신만의 정책 프로그램과 언어를 결여한, 냉전반공이념과 단순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에 그쳤다면 뉴라이트 세력의 선진화 담론은 과도한 민주주의에 의해 침식된 자유주의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추구할 것을 천명하며 ‘경쟁력’ ‘국민소득 n만 달러 시대’ ‘선진화’ 등과 같은 언어를 선점하고 이를 대중담론 속에 안착 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현재 이명박 대통령의 언사에서 자주 언급되는 선진화라는 단어는 뉴라이트 세력의 선진화 담론이 분파적 강령을 넘어선 우파의 공식적 국가비전으로 채택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박재완 한나라당 의원이 박세일 교수의 개념을 당의 이념으로 채택하였다고 말한 점을 감안한다면 선진화 담론의 주류화가 근거 없는 유추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선진화 담론의 대부격인 박세일 서울대 교수는 한국 현대사를 건국, 산업화, 민주화, 선진화로 구분하며 현재를 민주화에서 선진화로의 이행기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대한민국 세력과 반(反)대한민국 세력간의 갈등이 현재 한국의 혼란을 야기하고 건전한 이념경쟁을 막고 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는 반대한민국 세력을 몰아내고, 작은 정부가 산업의 구조조정 강화․  규제 철폐․  자주적 세계화 등을 통해 시장의 양적 성장을 도모하고 국제경쟁력을 강화함으로써 선진화 단계로의 성공적인 이행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의식적인 차원에서는 공동체를 통하여 개인이 국가의 차원에까지 자아를 확대함으로써 인격을 완성할 수 있으며  공과 사의 혼동․  반부(反富)의식과 반(反)기업 정서․  노동기피 내지 노동경시 문화라는 한국의 3대 후진 의식을 극복함으로써 선진화의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위와 같은 공동체 자유주의로 대표되는 뉴라이트의 선진화 담론은 합리적인 정책 프로그램을 결여하고 있으며, 철학적으로는 전통적 우파의 공동체주의와 오일 쇼크 이후 부상한 신우파의 신자유주의라는 서로 상극적인 요소들을 뒤섞어놓은 기괴한 담론-이 점에서 한국의 뉴라이트는 ‘사회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는 새처의 일관성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파괴할 가능성까지 있는 위험한 담론이다. 하지만 이 글의 목적은 우파의 국가비전 내용에 대한 검토가 아니라 우파의 행위에 대한 분석 및 대응방안 검토이기 때문에 선진화 담론 자체에 대한 자세한 비판은 생략하도록 하겠다. 어찌되었던 우파의 국가비전은 그 내용의 부실함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10년’ 간 민주개혁 세력의 실정(失政)에 대항한다는, 87년 민주화 항쟁에 대한 시공간을 초월한 반(反)혁명에 참여한다는 흥분을 활용하여 대중적 호소력을 얻는 데에 성공하였다. 또한 우파가 제시하는 시장의 유토피아는 시장 근본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사명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민주개혁 세력의 유토피아에 비해 훨씬 선명하며 알기 쉬운 모습이다.

 반대세력에게 친일파라는 비난-필자는 이러한 방식의 비난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까지 받는 이영훈 서울대 교수가 발간한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의 사관에 대해 구매자의 69%가 시대에 맞는 새로운 역사적 평가와 비판이라고 생각하였다는 통계(구매자를 상대로 행한 설문조사였다는 한계가 있지만 책을 보지도 않은 채 비난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그리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 역시 없을 것이다)와 선진화 담론의 기수인 박세일 서울대 교수의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이 책이 나온 지 9개월이 채 안된 시점에서 판매 부수가 이미 1만부(6쇄)를 넘어섰다는 자료는 우파의 비전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호응도를 반영한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의 관심과 호응은 선진화 담론으로 재무장한 한나라당이 출격한 2007년 대선에서 정점에 도달하였다. 이제 우파의 비전은 기존의 박정희 컬트종교에서 벗어나 대중적 담론이자 시대정신으로 승격된 것이다. 

 민주화 이후 최초로 자신들의 담론에 대한 극우파의 컬트적 지지가 아닌 대중의 지속적 관심과 호응을 경험하고, 그리고 대선에서 압도적 승리를 통해 집권한 우파 세력은 자신감을 가지기에 충분하였다. 2008년의 촛불 정국까지만 하더라도 머뭇거렸던 우파 세력은 촛불이 진압되는 것을 보며 자신감을 회복하였고, 또한 촛불에 대한 경계와 백안시는 이들로 하여금 제 2의 촛불을 막는다는 동기에서(이들이 촛불 자체의 힘에 대해 두려워하기 보다는 ‘계몽되지 못한’ 혹은 ‘세뇌된’ 대중의 발호를 귀찮게 여긴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더욱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프로그램을 강행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선진화 담론이라는 이론적 배경을 갖춘 이들의 프로그램은 단순한 극우반공주의를 목적으로 하는 권위주의 체제의 재생산을 뛰어넘은, 선진화 담론이 제시하는 시장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한 급진적 기획을 의미한다. 즉, 한나라당이 원하는 것은 10년 전으로의 회귀를 통하여 장기집권을 이루는 차원을 뛰어넘어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신질서를 관철시켜 사회를 혁명적으로 재편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미 그들의 기획은 문화계에서의 민예총 출신 및 한예종 공격, 뉴라이트 노조 및 교원단체의 설립 등을 통해 전방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물론 우파의 신질서는 경제적인 면에서는 시장 근본주의, 행정적인 면에서는 권위주의, 사상적인 면에서는 국가주의를 요체로 하는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적 면모를 보이지만 중요한 점은 신질서의 논리적 정합성이 아닌, 그것의 혁명성이다.

 그리고 지난 22일 통과된 4개의 법안 역시 우파의 신질서 기획이라는 거시적 맥락의 일부이다. 법안처리를 강행한 한나라당과 배후조종한 청와대, 지원사격을 하는 뉴라이트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미디어법을 통한 미디어산업 육성과 일자리 창출, 그리고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을 통한 금융업의 성장을 외치고 있으며 이 모두는 경제성장을 통한 선진화라는 명제로 귀결된다. 이는 산업의 구조조정 강화․  규제 철폐․  자주적 세계화 등을 통해 시장의 양적 성장을 도모하고 국제경쟁력을 강화한다는 선진화 담론의 명제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이 법안들은 시장 유토피아를 향한 질주가 시작될 도로를 닦는 역할을 담당한다. 미디어법과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을 통해 열릴 공간은 더 이상 정치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 무한경쟁의 법칙이 지배하는 자유로운 시장이다. 우파 세력에게 있어 자유로운 시장은 선진화의 핵심 기제이자 천국의 문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4개의 법안은 노무현의 4대 개혁안건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민주개혁 세력이 4대 개혁을 통해 자신들이 사회의 핵심모순이라고 생각하였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였다면, 우파 세력은 4개의 법안을 통해 자신들이 선진화를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하던 빗장을 열고자 한다. 요컨대 22일 통과된 4개의 법안은 단절적인 특수한 법안들이 아니라 우파의 신질서 구축이라는 거대한 계획을 완수하기 위한 핵심적 기제 중의 하나인 것이다. 한나라당이 절차적 논란을 감수하면서도 무리수를 두는 것은 우파의 신질서를 관철시키는, 시장 사회의 문을 열어젖힌다는 사명감과 더불어 지난 10년간에 대한 반혁명을 수행한다는 열정에서 기인한다. 한나라당이 단순히 재집권만을 염두에 둔다면 여론의 반발을 감수하면서까지 논란의 여지가 큰 행동을 감행하지 않은 채, 포퓰리즘 정책을 남발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겠지만 그들은 항상 논란을 몰고 다니며 사회의 전 영역에서 자신들의 신질서를 관철시키기 위한 투쟁에 앞장선다.

 우파 세력의 이러한 움직임의 역사적 전거는 새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 그리고 미국의 신우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제위기를 맞이하여 전후 복지국가에 대한 전면적 반동으로 등장하여 단순한 선거공학적 수사(修辭)가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혁명적인 담론의 재배열과 체제 재편을 목표로 한 이들의 행태는 현재 우파 세력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내비치는 엘리트주의적 자세와 권위주의적 자세는 시민사회의 갈등을 수렴하여 정치적 수단을 통해 해결하는 민주적 리더십을 지닌 지도자의 자세보다는, 악의적 반대파와 선동에 쉽게 넘어가는 우매한 대중의 저항에 맞서 충실한 소수의 지사(志士)들을 이끌어 신질서를 관철시키는 혁명가로서의 자세에 가깝다. 얼마 전 논란이 되었던 유인촌 장관의 학부모 세뇌 발언은 문화계 신질서 구축에 앞장서는 우파 세력의 무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자신들의 비전과 비전을 실현시킬 수 있는 권력에 도취된 우파 세력은 더 이상 정치적 타협을 선호하지 않으며, 순수성을 유지하는 소수를 이끌어 국가 전체를 개조하는 급진적인 혁명세력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정치행위를 포기하고 순수한 신질서의 구축에 전념하는 우파 세력의 전략은 당분간은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관료적 타성으로 인한 관료들의 소극적인 태도와 국가가 계속하여 기본 서비스를 공급할 것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로 인해 실패한 새처의 혁명에 비해 관료들의 자발적 과잉충성과 초계급적 복지에 대한 국민들의 무관심은 이명박의 신질서의 관철을 더욱 쉽게 만들어줄 것이다.

2. 반대파의 무질서(無秩序)

 문제는 이러한 우파의 신질서가 기반하고 있는 선진화 담론이 홉하우스 등의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었던 자유주의적 사회주의(liberal socialism)와 마찬가지로 좋은 말들을 끌어 모았음에도 이념을 제도적 실천으로 옮기기에는 어려움이 많은 하나의 추상적인 교리상의 아이디어가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선진화 담론을 시장주의와 공동체주의를 추구하는 데에 있어 필요한 정부의 역할을 제시하는 하나의 공식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이는 결론적으로 일관성 있는 유기적인 정책이 아닌 공동체주의와 신자유주의라는 서로 다른 기원에서 배태된, 그리고 공식 적용과 마찬가지로 기계적인 생산과정을 거친 패키지 형태로 제공된 타일들로 구성된 모자이크와 같다. 앞에서 언급하였다시피 그들의 프로그램은 간명함으로 인한 강력한 정서력 호소력에도 불구하고 실질적 내용면에서는 매우 조악하기 때문에 이러한 프로그램에 의해 만들어진 신질서는 매우 불안한 사상누각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정통 우파 세력에 반대하는 세력들로서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최대도전연합을 형성하여 우파의 신질서가 관철되는 것을 막아내야 한다는 당위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민주개혁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이 주장하는 ‘반 이명박 연대’ 로서의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연합이 우파의 신질서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세력과 시민들에 대해서는 강력한 호소력과 당위를 지닐 수 있겠지만, 우파의 신질서에 전면적 혐오와 반발을 가지지 않는 시민들의 적극적 동참을 이끌어낼 가능성은 매우 낮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간층을 포섭하지 못하였을 때, 신질서에 대한 강렬한 매혹과 물질적 이익에 대한 강력한 욕망으로 결집된 한나라당 고정 지지층에 비해 느슨한 가치관을 가지고 산발적으로 분포하는 민주개혁 세력의 지지자들은 어떠한 전술적 우위도 확보할 수가 없게 된다. 지난 10년과 현재를 대비시키며 민주주의의 회복을 촉구하는 식의 전술의 무기력함은 이미 2차 세계대전 당시 증명된 바가 있다. 다음은 당시 히틀러의 유럽과 맞서 싸우던 영국 내에서 나온 몇 개의 반응들이다.

 “이 오래된 제국은 일련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실수들 때문에 ‘히틀러를 종식’ 시키기 위한 세계대전에 얽혀 들었을 뿐, 히틀러 이후에 어떤 질서가 도래해야 하는지 적대자들에게, 나아가 전 세계에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못했다. 분명 이들은 그 구체적인 방법도 없이 그저 독일이 무력해지기를, 그래서 골프장이나 낚시터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그리고 저녁을 먹고 난 다음 벽난로 앞에서 졸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그 내용 어디에도 우리가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전쟁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언급은 없다. ......이 헌장은, 민주주의 국가들은 과거의 방법을 보존하고 유지하기를 원하는 반면, 전체주의 세력은 새롭고 상상력이 풍부한 무엇인가를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암시한다는 문제가 있다”

“대변인들은 대영제국, 미국, 프랑스, 전쟁 중의 요리법, 나치 지배의 공포, 히틀러의 신질서 등에 대해 설교하지만, 우리의 신질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사실상 우리가 겪고 있는 이데올로기 전쟁이나 사회혁명에 대해서는 어떤 인식도 없는 것이다"

 단어 몇 개들만 각색한다면 현재 대안 없는 ‘반 이명박 연대’ 를 주장하는 세력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서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히틀러와 관련된 예시를 들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정권을 나치와 등치시켜 악마화 하는 오류를 범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위의 비판들의 핵심은 히틀러는 악마라는 것이 아니라, 갈등의 성격을 정확히 짚고 그에 대한 적극적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이명박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이 해야 할 일 역시 우파 세력의 전면적인 공세 속에서 그들의 신질서가 목표로 하는 것과 그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대한 또 다른 질서를 제시하는 것이다. 우파 세력의 전횡에 대하여 적극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과거의 도식을 그대로 빌려와 그것이 반민주적이라는 혐의를 씌우는 것은 매우 무력할뿐더러 위선적이기까지 하다. 이미 산업화-민주화-선진화라는 단계론을 성공적으로 유포시킨 세력 앞에서 자신이 민주화 세력임을 자처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선진화 세력의 발목을 잡으며 역사의 발전을 가로막는 퇴행적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모양새가 된다. 또한 현재 이명박 대통령 개인에게 집중되고 있는 공격은 이명박 대통령 퇴임 후에는 그를 구속시키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 우파의 신질서를 보지 않고 ‘이명박의 악행’ 만을 보는 한 이명박 이후에 대한 기약 역시 전혀 없다.

 게다가 민주주의에 대해 서로 경쟁하는 복수의 정당들에 대한 주기적 투표라는 최소주의적 정의를 적용한다면 이명박 정부는 결코 반민주 정권이 아니며, 사회적․  경제적 권리를 적극적으로 보장하고 차별에 의한 손해를 시정한다는 최대강령적 정의를 적용한다면 지난 10년의 민주정부 역시 그리 민주적이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특히 한국 민주주의는 최소주의적 정의에서 바라보더라도 로버트 달이 민주주의의 요건으로 제시한 조건 중 하나인 조직된 반대(organized opposition)의 조건이 제대로 실현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피터 마이어는 ‘조직된 반대의 권리’ 요건이 달성된 지표로서 서구에서 사회주의 정당의 집권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물론 민주노동당의 약진은 축하할 만한 일이고, 그것 자체가 한국 민주주의의 성과이기는 하지만 민주개혁 세력이 지난 10년간 좌파와 노동에 대해 보인 태도를 상기해보자면 이들 역시 이명박 정부에 대해 큰소리 칠 계제가 된다고 보기는 힘들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제대로 된 시민권을 얻지 못한 수많은 노동, 그리고 앞으로 양산될 비정규 노동에 대한 적극적 공범으로써 민주개혁 세력이 내세울 것은 더욱 없다.



 좌파에 대한 반성과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 없이 반 이명박의 기치만을 내세우는 현재 민주개혁 세력의 문제의식은 매우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현재 큰 논란이 되고 있는 미디어법은 경제구조 자체를 재편할 수 있는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에 비해 그 영향력이 크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럼에도 금융지주회사법에 대한 언급은 회피한 채 미디어법에 대한 반대 선전만 일삼는 민주개혁 세력의 의중은 결국 2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집권 시기에 자신들이 백기투항한 시장주의의 이념 때문에 금융지주회사법을 비판하는 것은 어렵다. 둘째, 우파의 신질서 수립에 대한 위기의식이나 문제의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미디어법을 단발성 정책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근시안적 시각으로는 당장의 여론을 결집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여론을 실질적 힘을 지닌 정치적 세력으로 규합하는 것은 어렵다. 보통 시장에서 마케팅을 할 때도 상대의 상품에 대한 비난보다는 자신의 상품을 어필하는 데에 주력하는 법이지만, 충실한 시장주의자인 민주개혁 세력은 네거티브 광고의 단기적 효과에만 매몰되어 있다. 4개 법안의 통과로 체제변동의 가능성을 열어젖히고, 쌍용차 노조의 농성에 강력한 공권력을 투입함으로써 계급의 전쟁을 개시한 우파 세력에 민주개혁 세력의 무기력함과 위선으로 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민들이 원하는 것은 현재 어떤 문제가 일어나고 있으며, 그 문제의 원인은 무엇이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명쾌하고 일관성 있게 제시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시국을 민주 대 반민주 구도로 정의하는 개념은 폐기처분해야 마땅할 것이다. 이는 반이명박 세력의 기존 지지자들을 만족시키고 그들을 동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머지 시민들에게 호소력을 가지기 어렵다. 앞에서 말하였다시피 현 민주개혁 세력에게 이명박 정부를 반민주 정부라고 정의할 자격은 없다. 우리의 문제는 ‘어떤’ 민주주의인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우파 세력은 선진화 담론을 내세운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제시하고 있지만 반 이명박 세력에서는 어떤 답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실정이다. 민주개혁 세력이 외치는 민주주의의 회복이란 결국 중산층의 도덕감정만을 만족시키는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의 회귀이다. 어느 쪽의 민주주의에도 노동과 빈민은 존재하지 않는다. 히틀러와의 전쟁을 통해 자유방임주의적 민주주의가 각각 대중 민주주의와 인민 민주주의로 혁신되었다면, 한국의 민주주의 역시 신자유주의의 전위를 자처하는 우파의 혁명적 신질서에 맞서 스스로를 혁신해야만 우파의 신질서에 대한 위험한 매혹으로부터 사회와 계급을 구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답을 제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오늘날의 대중 민주주의 역시 히틀러의 신질서에 무기력한 관성적 비난만을 되풀이하는 영국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촉발된 수많은 논의들 끝에 나온 것이니 만큼, 이 글 역시 민주개혁 세력의 무기력한 관성적 비난에 대한 지적으로서의 역할만을 하려고 한다. 앞으로 ‘이명박의 악행’ 이 아닌, ‘이명박 이후’ 그리고 ‘좌파의 신질서’ 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져 많은 시민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고 기존의 보수적 민주주의에서 배제되었던 수많은 목소리들에 시민권을 줄 수 있는 유의미한 정치적 대안이 조직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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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너머에 있는 실재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