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게시판
최근 진보신당의 당헌 및 당규를 둘러싼 논의가 수면위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당내에서 일어났던 논쟁들은 고도의 추상성을 담보하는 이념적 논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논쟁은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와 현실의 문제를 중심으로 한 것이다. 제도에 대한 논쟁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집권을 목표로하는 공당으로서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특정 정당이 아무리 좋은 이념을 가지고 있어도 이념을 현실에 반영시킬 좋은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의미있는 사회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 정당이론가 사르토리의 지적대로 제도는 우선 작동 가능한 것이어야 하며 제도는 그 자체가 도덕성의 판단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제재(制裁)와 보상(報償)으로 구성된 유인체계의 틀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제도를 둘러싼 논의는 도덕성 혹은 진정성을 검증하는 종교재판이 되기 쉽다. 아쉽게도 현재 당내에서 제도를 둘러싼 논의는 사르토리가 말한 구체적인 제도의 작동기제 및 기대효과와 같은 현실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제도의 취지라는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단계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접근이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제도가 바로 여성할당제이다. 3월 1일 당 대회에서 논의하게 될 당헌 및 당규 원안에 의하면 전체 선출직과 임명직 중 30%를 여성에게 할당하며 선출직의 할당은 일반명부와 분리된 여성명부에 대한 투표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된다. 문제는 이와 같은 제도가 여성의 정치참여라는 선한 동기와는 달리 왜곡된 결과를 낳았다는 점이다. 위의 규정에 의거하여 치러진 최근 대의원 선거만 보더라도 제도의 문제점은 명백하게 드러난다. 가장 극적인 문제점을 들자면 명부 할당을 맞추기 위해 일반명부가 없이 여성과 장애인 대의원만을 선출해야 하는 일종의 게리맨더링까지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 최근 필자와 권병덕, 허건 대의원이 함께 발의한 당헌 및 당규 개정안은 여성 할당 비율을 3명당 1명으로 조정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통합단일명부에 의한 선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는 의무적으로 배정된 자리를 채우기 위해 당원을 동원하는 폐단 (애초 취지와는 달리 여성의 정치‘참여’ 가 아니라 ‘복무’를 읍소하는 실정) 을 합리적인 수준에서 조정하기 위해 제안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할당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 대해 쏟아지는 규탄은 발의자들의 지적한 현실적 문제에 대한 교정수단을 제시하지 않으며 제도의 이념적 당위성만을 내세우고 있다.
여성의 정치참여를 당위로 내세워 현행 여성할당제를 강력하게 옹호하는 주장의 이면에는 민주주의는 인민에 의한 직접통치를 의미하며 모든 ‘민주적 가치(양성평등, 경제적 평등 등)’ 들을 포함한다는, 민주주의에 대한 최대강령적 이해가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인민의 직접통치를 강조하며 여성의 목소리는 여성 자신에 의해서만 대변될 수 있다는 생각은 다수의 합의를 통해 정책으로 표현되는 정당의 목소리와 개개인이 말하는 감성적 체험담을 구분하지 못하는 낭만적 사고일 뿐이다. 그리고 여성만의 특수이익이 존재한다면 이는 여성 부문 창설 후 이에 대한 할당으로 해결할 문제이지 광범위한 영역에서의 전체적 할당을 통해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부문으로 조직화된 여성은 오히려 지역과 부문별로 산개된 여성에 비해 훨씬 적극적이고 단일한 목소리로 여성의 권익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에 의하면 민주주의는 인민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인민이 피치(彼治)에 대해 동의하는 체제이다. 따라서 단순히 여성정치인의 수를 양성평등의 척도로 삼을 수는 없다. 현재 한나라당의 당헌에는 지역 대의원 및 국회의원 지명 대의원의 50%를 여성으로 할당하게 되어 있으며 최고위원과 같은 고위직의 경우는 여성당선자가 한명도 없을 경우 여성 최다득표자에게 한 자리를 배당해주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게다가 현재 한나라당에는 박근혜, 나경원, 전여옥 과 같은 스타급 여성 정치인들이 다수 활약하고 있다. 그렇지만 과연 한나라당이 여성친화적 정당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중요한 것은 단순한 생물학적 여성의 수가 아니라 정당 내부의 여성친화적 분위기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기계적 할당이 아닌 선거과정에서의 철저한 검증과 여성친화적 개혁정책의 개발을 통해 해결할 문제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최대강령적 이해에서 벗어나 현실에서 작동 가능한 제도적 절차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대표와 책임의 체제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전 영역에 걸친 여성할당은 다른 부문할당에 비해 과잉대표 되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각 지역과 부문 내의 여성이 여성 스스로에 의해 대표되어야 한다면, 비정규직이나 성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소수자들의 대표 가능성 역시 동일하게 존중받아야 한다. 어떠한 근거에서 성별만이 전 영역을 포괄하여 각자의 영역에서 광범위하게 대표되어야 하는 근본모순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는가. 따라서 근본적으로 보자면, 여성할당은 부문으로 배정되어야 한다.
또한 앞에서 지적하였다시피 여성할당제로 인해 생겨난 공간을 채울 소명의식 있는 여성 정치가 자체가 극도로 부족한 실정에서 전 영역에서 의무적으로 공간을 비워놓는다는 것은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방해하는 비효율적인 행위이다. 이미 제도권에 안착한 기성정당과는 달리 가용가능한 자원이 매우 적은 신생정당에게 있어 자원의 비효율적 배분은 정당의 집권가능성과 제도권 안착을 가로막는 중대한 질곡으로 작용한다.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이라면 단순히 당내 여성정치인의 수가 성평등지수와 연결된다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그 기회비용을 냉정하게 계산해 볼 수 있어야 한다. 현재와 같은 전 영역에 대한 여성할당제는 성별을 막론하고 당직을 희망하게 만드는 인센티브를 제공할 여력이 된 이후에야, 그리고 당이 생존의 단계를 넘어 가치를 둘러싼 담론에 공식 행위자로서 들어갈 정도의 위상을 지닌 후에야 검토해 볼 문제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그의 저서 <담대한 희망>에서 소수자 우대법(affirmative action)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는 소수자 우대법이 역사적 과정이 있으며 자원이 풍족한 호황기에는 다수의 관용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자원 자체가 부족한 불황기에는 오히려 다수의 증오감을 유발하기 때문에 소수자 우대법을 사회 구성원 모두가 보편적으로 누릴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여기서 소수자의 불이익과 다수의 불안 모두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고 중재 지점을 찾는 오바마의 문제의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성정치인의 희소성이 남성들과의 경쟁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지망자 자체의 희소성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예컨대 차기 여성 정치인을 양성하는 교육과정의 수립과 같은 대안도 가능할 것이다.
이미 많은 문제를 보이고 있는 여성할당제를 고수하는 것보다는, 다양한 방식의 당내 여성권익 향상 방안을 연구하는 것이 실제적인 여성의 권익 향상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 현재와 같은 형태의 여성할당제가 도덕적 명분 외에 구체적인 실익을 낳는다고 보기는 힘들다. 단순히 당내 여성정치인의 수가 증가하는 것을 넘어 여성이 실제적 권익을 누리기 위해서는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정치에 대한 과도한 도덕주의적, 이데올로기적 접근에서 벗어나 문제에 전략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을 통해 현실적인 사고를 제약한다. 사안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접근은 끊임없이 도덕적 열정과 규탄을 수반하며 이는 정치과정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의가 들어설 기반을 해체하며 정치를 검증 불가능한 진정성의 경쟁장으로 만드는 나쁜 효과를 낳는다.
여성할당제에 대한 기존의 논의 상당부분이 비이성적으로 이루어져 왔던 것은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에서 기인한다. 기존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맞서 동원된 여성주의 이데올로기는 억압과 투쟁이라는 세계관을 통해, 여성에게 배당되어야 할 몫의 양에 대한 합리적 계산 제안마저 자신들의 정당한 몫을 침해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며 이는 매우 감정적인 반발로 표출된다. 하지만 정당은 기본적으로 선거를 통해 정치권력을 획득하고자 하는 집단이며 정당의 운영은 일차적으로 집권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정당이 집권 외의 사안-예컨대 당내 ‘실질적’ 민주주의의 보장-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것은 자족적 공동체 이상의, 사회 내에서 변화를 추동하는 의미 있는 세력으로 존재하기 힘들다.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통치의 내용이지 통치의 주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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