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게시판
1. 교통정리
현재 진행되고 있는 논쟁의 시발점은 금다니엘 님의 제안에 대한 권병덕 님의 비판입니다. 코스프레와 같은 집회, 장학기금 조성, 명동으로의 당사 이전으로 요약할 수 있는 금다니엘 님의 제안은 소위 '운동권' 의 이미지 개선을 핵심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권병덕 님은 금다니엘 님의 근거 부실을 이유로 반지성주의라는 지적을 하였고, 최광재 님은 이에 대해 '창조적 파괴' 를 내세우며 재반박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권병덕 님이 지적하시는 부분과 최광재 님의 반박은 서로 맞물리지 못하고 있기에 일단의 교통정리가 선행되어야 하겠습니다.
우선 앞에서 간략히 언급했다시피 권병덕 님은 금다니엘 님의 제안을 구체적 근거를 갖추고 있지 않으며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결여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반지성주의로 규정 하였습니다. 금다니엘 님의 평소 언행을 모르는 저로서는 금다니엘 님의 제안이 불성실한 측면이 있지만 그것이 과연 적극적으로 이론과 성찰에 반대하는 반지성주의의 경향을 띄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즉, 금다니엘 님의 주장이 현실정합성이 결여되었다는 측면에서는 비판받을 지점이 있겠고 저러한 제안이 반지성주의로 발전할 만한 소지가 있지만 그러한 제안 자체를 반지성주의적-정책팀을 축소하자는 정도의 제안이라면 충분히 저 혐의가 적용될 수 있다고 봅니다-이라고 규정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최광재 님은 권병덕 님의 반지성주의 규탄에 대해서 '창조적 파괴' 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반박을 하였지만 이것이 과연 권병덕 님의 주장에 대한 제대로 된 반박인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최광재 님의 반박에는 '창조적 파괴' 의 구체적 내용(최광재 님은 결과가 투입비용보다 크다면 창조적 파괴가 용인될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결국 대차대조표를 성실하게 작성하라는 권병덕 님의 주장과 배치되지 않습니다)과 그것이 어떻게 지성보다 우월할 수 있는지, 혹은 금다니엘 님의 주장이 반지성주의가 아니라 지성을 포함한 창초적 파괴라는 점을 효과적으로 논증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요컨대 권병덕 님의 비판의 핵심이였던 '지성' 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쟁점인 명동 당사 이전에 대해서는 최광재 님이 반박 지점을 제대로 짚어 주셨습니다. 양 측의 주장을 요약해보자면 권병덕 님은 부지비용 및 기자들의 접근성, 그리고 이로부터 파생되는 정보량의 이점 때문에 당사 이전을 반대하며 최광재 님은 대중들과의 직접적 접촉 가능성 때문에 당사 이전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도 있다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논쟁을 지켜보는 분들이 각자 주관에 따라 현실정합성을 따져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우려하는 것은 금다니엘 님과 최광재 님이 당사 이전의 찬성 논거로 내세우는 부분, 즉 대중과의 소통 가능성에 대한 관점의 기저에 깔려있는 정당관의 문제입니다.
2. 일반의지와 정당
문제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한가지 개념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사회계약론> 등의 저서를 통해 자유민권 사상가로 알려져 있는 장 자크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이 그것입니다. 루소는 사회를 개별의지와 집합의지, 일반의지의 세가지 층위로 구분합니다. 개별의지는 개인의 의사이며 집합의지는 이 개별의지들의 단순한 총합, 그리고 일반의지는 집합의지의 본질을 이루는, 유기체로서의 사회의 단일한 의지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루소의 사상은 주권을 왕이라는 개인에게 집약시키는 보뎅 류의 왕권신수설의 사상적 얼개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격적 주권론(여기서 인격적이라는 말은 긍정적 술어가 아닌, 주권과 의지를 지닌 단일한 실체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을 지칭합니다)의 흔적이며, 사회의 단일한 이익과 의지가 존재한다는 일반의지의 개념은 자신들이 일반의지를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단일정당이나 개인의 독재를 정당화하는 용도로 악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다시 정당관의 문제로 돌아가겠습니다. 금다니엘 님과 최광재 님은 명동으로의 당사 이전의 가장 중요한 이점으로 대중과의 소통 가능성을 뽑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분 모두 그 대중이 어떠한 대중이며 이들과의 소통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고민이 결여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비단 두 분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두 분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말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진보정당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대중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최대한 자주 하는 것이 서민을 대변하는 정당으로서의 자세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원론적으로는 지당한 말입니다. 문제는 소통의 방식입니다.
대중과의 소통을 주장하는 분들의 주장의 상당수는 대중의 일반의지와 직접적으로 대면하고 그것을 반영해야 한다는 식의, 신과 인간 사이의 법열(法悅)을 방불케 하는 신학적 사고방식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을 '그 자체로서의(sui generus) 사회' 로 전치시키며 '사회는 신의 또 다른 이름' 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파 정당이 주장하는 허구적인 국민통합이 아닌, 사회적 균열에 기반한 정당체제를 전제로 행동하는 진보정당이 사회유기체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단일한 질(質)로서의 대중을 가정하며(이는 파시즘의 주요 특징입니다) 그들의 단일한 일반의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자세입니다.
사회과학적으로 '서민' 의 정의는 본질적으로 모호할 수 밖에 없으며 이러한 서민들의 단일한 이익이 존재한다는 사고 방식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서로 적대적인 계급의 투쟁의 역사라는 맑스의 도식을 빌리지 않더라도 수많은 사회학자들이 현대사회의 특징은 기능과 이익의 분화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대중의 일반의지의 존재여부에 대한 증명이 선행되지 않은채 일반의지와 직접 접촉하기 위해 거리로 나가는 것은 소모적인 일입니다. 따라서 단일한 질(質)로서의 서민대중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는 발상은 현실정치에서는 하등 쓸모없는, 하지만 인민에 의한 직접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슬로건에는 부합하는 일종의 레토릭 혹은 신화적 발상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당은 기본적으로 사회의 균열선을 따라 분열되어 있는 인민의 열정을 지배적인 모순을 축으로 규합하여 그것을 제도화된 형태로 정치영역에서 풀어내는 조직입니다. 이 과정 중 한가지만 결여되더라도 그것은 제대로 된 정당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대중과의 직접적 소통을 강조하는 분들은 인민의 열정을 정제하고 정치적으로 풀어가는 과정을 생략하고 단순히 그것을 규합하여 정치외적인 혁명적 수단으로 활용하자는 뉘앙스를 풍길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자코뱅 독재부터 스탈린 독재까지 좌우를 망라한 전체주의 정권들의 공통점은 '인민의 일반의지' 와 '지도자' 혹은 '변혁' 의 직접적 대면을 강조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보정당은 그렇지 않다고 강변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더 이상 민주주의가 아니라 수호자주의이며, 우리에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인민의 일반의지와 실제 일반의지(존재한다면)가 일치하는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정당 모델은 크게 전문가 정당과 대중 정당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양자의 이념형은 전자가 선거 전문가에 의한 '지지자' 의 확대를 목표로 하는 포괄정당이라면 후자는 뚜렷한 정강과 정책방향을 가지고 기층 당원들에 의해 움직이는 정당입니다. 무차별적으로 대중을 만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주장은 전문가 정당 모델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진보정당은 폭넓은 당원층을 기반으로 당원들간의 소통에 기반하여 당의 정책 수립과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대중정당이 되어야 합니다. 전문가 정당은 본질적으로 득표수가 중요하기 때문에 대중과 정당 자신이 변증법적 관계를 통하여 서로 바뀌어나가는 것이 힘들며 정치공학에 의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집권을 목표로 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100% 의 지지를 얻으려는 시도가 아닌, 이 시대의 가장 지배적인 모순을 균열축으로 삼고 그것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규합함으로써, 50%의 지지율을 목표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소통의 문제를 다시 언급하자면 정당은 기본적으로 정치적 층위에서 활동하는 조직이기 때문에 일반 대중과의 소통은 기층 당원이 담당할 일이지 당 사무실 이전 등을 통해 당 공식기관이 나설 일은 아닙니다. 당 공식기관이 할 일은 기층 당원들이 일반 대중과의 소통을 통해 얻어온 정보들을 규합하여 전체적인 전략을 수립하고 정책을 만드는 '정치적인' 일입니다. 당원들의 존재 이유는 단순히 당의 위세를 위해서가 아닌, 일반 대중과 당 사이의 교두보의 역할을 하며 당을 변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진보정당이 추구하는 소통의 방식은 무차별적으로 대중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통해서는 일방적인 계몽 혹은 얼굴도장찍기 이상의 것이 이루어질 수 없으며 정당으로서는 피드백을 받을 방법이 부재합니다. 요컨대 '현재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는 자위 이상의 것이 나올 수 가 없습니다. 서로 층위가 다른 개별 대중과 정당 사이에 진솔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봅니다.개별 대중이 아닌, 단일한 질로서의 대중의 일반의지를 당의 직접 접촉을 통해 읽어내겠다는 식의 발상의 무익함 역시 딱히 다시 말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일반의지' 를 등에 업고 '헤게모니 투쟁' 과 '지적 압도' 없이 사회를 바꾸어 보겠다는-저는 저 두가지 방법을 제외하면 정상적인 선거를 통하여 집권할 수 있는 방법은 떠오르지 않고 생디칼리즘 적인 방법 밖에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주의주의가 아닌 냉정한 계산에 의한 정치입니다.
3. 운동을 넘어 정치로
현재 진보정당에 몸담고 계신 많은 분들이 운동단체와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상당히 우려스럽습니다. 보수 양당 체제가 오랫동안 지속된 보수적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진보정당의 활동영역과 사회운동의 활동영역이 상당부분 겹칠 수 밖에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양자가 굳이 분리되어 각자 존재하는 이유 역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운동은 기본적으로 열정을 여과없이 힘으로 전화(傳化)하여 정치외적인 압력을 통해 모순을 일거에 타파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반면 정당은 열정을 제도적으로 정제하여 정치영역 내에서의 경쟁을 통해 점진적인 변화를 이루어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보다시피 양자의 작동 방식과 목표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정당을 통해 일거에 혁명적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시도는 급격한 변화에 맞서 대자적으로 조직된 관료층 및 기존 헤게모니의 저항에 부딪쳐 좌초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혁명과 같이 정치외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 경우에는 굳이 그 매개체로 정당을 선택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언뜻 보면 정치를 통한 변화는 골치아프고 큰 효과도 없어 보이지만 가장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수단이기도 합니다. 단지 급격한 변화 자체만을 원한다면 진보정당 활동이 아닌 아나키즘 혹은 볼셰비즘에 투신하여야 할 것입니다. 급격한 사회변동 과정에 참여할 수 없는, 혹은 변동 자체에 의해 낙오되는 약자들의 삶이 파괴되는 것을 최대한 막기 위해 우리는 정당이라는 수단을 선택한 것입니다. 또한 정당은 가장 효과적으로 민의를 반영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사회운동은 그것에 투신할 수 있는 자원 혹은 열정을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가 과대대표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진정 사회에 인민대중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원한다면 그것은 인민의 일반의지를 읽어냈다는 독단을 가진 혁명투사가 주도하는 일방적 개혁이 아닌, 당원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정책을 가다듬고 의회에서 서로 다른 사회적 균열에 기반한 정당의 의원들과 부단히 토론하며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정당이라는 수단을 선택하여 정치과정에 뛰어든 이상 권력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는 것 역시 지양하여야 할 것입니다. 조직되어 있는 헤게모니에 비조직적인 대오로 뛰어드는 것은 어떠한 성과도 거두기가 힘듭니다. 요새들어 거의 신앙의 수준으로 남용되는 경향이 있기는 합니다만 리더십은 좌우를 불문하고 정치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박정희가 없었다면 10월 유신과 산업화는 불가능 했을 것이며 역시 김일성이 없었다면 주체사상은 태어나지도 못했으며 북한 체제는 지금까지 버티지 못했을 것입니다. 권력과 정치에 대해 통찰력 있는 많은 연구를 수행한 위대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지나친 관료화로 민주주의가 고사하는 사회에 대한 대안으로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희구했을 정도이니 정치에 있어서 리더십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필수적인 요소를 무조건 터부시하며 배척한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기존의 의회 정당정치에 대해 '여의도 정치' 로 폄하하는 것은 2MB 대통령의 후보시절 발언에 자주 등장하였습니다. 이 지점에서 운동과 신자유주의 노선의 기묘한 동거가 발생합니다. 진보적 학자였던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이 사회질서 유지를 강조한 보수적 학자 뒤르켐의 사회에 대한 개념과 통하듯이, 그리고 맑시스트 발터 벤야민의 신적 폭력 개념에 대해 나치의 법학자 칼 슈미트가 찬사를 보냈듯이 상황의 지나친 단순화는 극과 극을 통하게 만듭니다. 여기서 저는 단순히 극단적인 것은 지양하여야 한다는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러한 극단이 현실에서 어떠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가 입니다. 정치에 대해 좌우에서 퍼붓는 맹공은 정치에 대한 회의주의와 냉소주의를 유발하여 한국에서의 정상적인 정당정치가 이루어지기 힘들게 만들고, 이러한 정치의 실종이 다시 정치에 대한 회의를 재생한하는 악순환의 구조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이미 결과로 나타났다시피 이러한 악순환 구조는 신자유주의 노선의 손만을 들어주었습니다. 정치의 실종은 '혁명적 좌익' 세력을 충원해주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대중을 규합하여 2MB를 직접 권좌에서 끌어내리자는 식의 해법을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앞에서 말했다시피 이러한 직접행동에 의한 혁명적 변화는 기존의 헤게모니를 효과적으로 타파하지도 못할뿐더러 수많은 희생을 낳기 때문에 정당을 선택한 우리들로서는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진보정당에 있는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2MB 와 한나라당이라는 물화된 보수이념을 물리적으로 몰아내는 방법이 아닌, 사회 전반에 걸쳐 깊숙히 새겨져 반동세력의 망령을 끊임없이 초혼하는 헤게모니적 인각을 극복하는 방법입니다. 헤게모니를 극복하는 것은 일거에 사회적 관계를 혁명적으로 재편하는 신적 폭력이 아닌, 정당이라는 진지를 둔 지난한 진지전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운동의 열정을 등에 업고 정권을 쟁취한 노무현 정부가 관료와 재벌의 늪 속으로 빠져들어간 이유는 그들을 지속적으로 뒷받침해주고 대항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진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보정당은 기본적으로 집권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집권 후의 과정은 더 이상 운동이 아닌 정치입니다.
상상력 역시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진지한 성찰과 반성, 고민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떠한 실제적 효과도 낳지 못하는 감정의 발산으로 그칠 것입니다. 극단의 시대를 지나 침체의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는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나는 사랑하듯이 혁명한다' 등의 멋지고 요란한 구호가 나돌며 상상력이 발산하는 것처럼 보일 때일수록 정작 중요한 변화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에릭 홉스봄의 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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