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이 1946년 5월 한성일보에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를 써서 박헌영을 강하게 비판한 것은 의외였다. 조봉암은 ‘내가 걸어온 길’(『희망』 1957년 2∼4월호)에서 “공청(共靑: 고려공산청년회) 조직 책임은 그 전년에 출옥해서 당시 동아일보에 근무하던 박헌영(朴憲永)에게 맡겼다”고 할 정도로 오랜 동지였기 때문이다. 1925년 결성된 조선공산당(조공) 중앙검사위원이기도 했던 조봉암은 코민테른 극동국 위원으로 상해에서 활동했다. 이때 김금옥 여사와 첫딸을 낳자 상해의 옛 지명인 호강(扈江)을 따 호정(扈晶)이라고 이름 짓기도 하는데 1932년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는다. 신의주 형무소에서 “떨다 지쳐 잠자다 얼어 죽으면 궤짝 속에 넣어 파묻는 것이고 살아남으면 징역살이를 되풀이하는 것뿐”이라고 회상할 정도로 혹독한 감옥살이였다.
72명의 무소속 구락부의 추천과 이승만의 권유 등으로 ‘꿈에도 생각지 못한’ 초대정부의 농림부 장관이 된 조봉암은 식민잔재와 반봉건적 유제를 일소하는 농촌근대화를 목표로 삼았다. 정부가 양곡을 매입해 중간상의 폭리를 배제한 양곡매입법(糧穀買入法)이나 농지개혁법안은 한민당의 맹렬한 반대를 받지만 나중에 모두 현실화되었다는 점에서 혜안이 돋보인다. 재선된 조봉암은 국회부의장에 선출되고, 1956년의 대통령 선거에 진보당추진위원회의 후보로 출마한다. ‘나의 정치백서’에서 조봉암은 “투표일 며칠 앞두고 우리 당 후보의 입후보를 취소하고 야당연합적인 투표를 하게…(해공 신익희와) 합의를 보아 두었다”고 전하는데 해공의 급서로 무산되었다. 조봉암은 216만 표, 신익희는 추모표 185만 표를 얻었고 이승만은 504만 표를 얻어 당선되었지만 부정선거라는 논란이 잇따랐다.
진보당은 통일정책 정강에서 ‘6·25의 죄과를 범한 북한의 반성과 책임규명은 평화통일의 선행조건이 아닐 수 없다’라고 명시했지만 당수 조봉암은 간첩죄와 국가변란죄로 사형당했다.
이덕일 역사학자





21
 
1053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