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말부터 진보세력 중 사회민주주의를 내세워서 성공한 경우는 없었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가 후퇴하는 것을 본 한국의 좌파 학자들은 사민주의의 한계를 보고, 국가 사회주의도 아니고 사회민주주의도 아닌 무언가를 찾는데 더 골몰했다. 

그러나 이런 이론가나 진보정치가는 헛다리를 짚은 것이다. 요는 대중의 삶을 어떻게 개선하느냐다.


사회주의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요구이다. 대중들이 이해하는 언어로 사회주의의 상을 제시할 수 있는가? 그리고 한국사회가 사회주의로 나갈 조건을 가지고 있는가? 내가 보기엔 아니다. 한국사회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노동운동은 꽃이 피기도 전에 시들었다. 민주주의는 시장의 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라의 경제력은 세계의 선진국들과 어깨를 겨룰 정도로 성장했지만, 영세 자영업자들과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의 삶은 후진국 수준이다. 최첨단의 대형 매장과 시장 바닥의 좌판이 공존하는 이상한 사회가 한국이다.

어떻게 하면 대중의 삶을 개선할 것인가? 그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하면 진보라는 간판을 내려야 한다.

 

1. 권력은 돈과 총구에서 나온다고들 한다. 부자와 군부가 권력을 움직이는 진짜 힘임으로 여러 나라가 보여줬다. 그런 걸 막는 게 바로 민주주의다. 1인 1표제는 대단한 제도다. 계급사회에서 피지배계급은 압도적 다수일 수 밖에 없다. 압도적 다수에게 부자들과 똑같이 투표권을 준다는 건 혁명적인 것이다. 그러기에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투표하지 못하게 보이지 않는 함정을 많이 파 놓았다. 예를 들어 투표권이 없는 전과자들이 많다. 투표날에도 일을 나가기 때문에 투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매일 고된 노동에 시달리고, 노조 같은 조직이 없기 때문에, 정치적인 각성을 할 기회를 못 가져서 정치에 무관심하고 투표를 안하는 층이 많다. 또 24시간 나오는 방송에서는 정치인들이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는 것만 계속 집중적으로 내보내고, 그들의 비리를 고발하는데 집중하기 때문에 정치인들은 도둑놈이라는 생각을 심어줬고, 그게 잘 맞아 떨어져서 정치 혐오증이 심각하다. 그러는 사이에 강남은 높은 투표율과 한나라당 몰표로 1인 1표제의 불리한 환경을 잘 극복하고 있다.


2. 진보정당들은 피부에 와 닿는 얘기를 하지 않고 있다. 당장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물질적 약속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법이다. 그러기에 유럽정당들은 자신들의 정책이 평균급여를 받는 노동자들의 소득을 몇 천원, 몇 만원 올릴 수 있다는 계산을 들고 나와서 대중들을 설득한다. 진보정당이 잘 되려면 바로 그런 당장 손에 쥘 수 있는 약속을 해야 한다. 그래서 표가 바로 일자리로, 복지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3. 대중에 대한 설득이 이뤄져야 한다. 미디어는 가진자들의 이익을 대변한다. 그렇게 잘 짜여져 있다. 유일하게 대중들을 설득할 수 있는 건 선거운동에 나설 사람들이다. 입 소문으로 퍼져 나가는 선거운동이 되려면 사회민주주의 대중정당이 필요하다. 당원이 수십만명은 되어야 한다.


4. 한국사회가 가진 한계를 솔직히 얘기해야 한다. 우리는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다. 식량과 에너지 자립도 안된다. 세계 자본주의체제에 깊숙히 들어가 있기 때문에 까딱하면 국가부도의 위험에 빠진다. 이런 나라에서 베네쥬엘라 같은 개혁을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큰 걸 얻을 수는 없다. 지금의 경제가 지탱할 수 있는 수준에서 속도 조절하면서 변화를 추구해야만 한다. 자본주의 나라 중 그나마 노동자들의 권리가 실현되고, 빈부격차가 상대적으로 적으며, 인간의 가치가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자. 그걸 복지사회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5. 개성공단 북한 노동자의 한달 월급이 70달러다. 남한 노동자의 한달 월급은 최소한 700달러는 된다. 월급은 적게는 열 배에서 많게는 삼 사십 배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노동자들이 남한으로 자유롭게 올 수 있다면 남북 모두 엄청난 충격이 온다. 통일은 더 이상 우리의 소원이 아니다. 통일은 서로 차이가 너무 커진 두 사회가 점진적으로 동질성을 회복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이탈리아와 루마니아가 통일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두 나라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로마의 후손들이다. 통일은 반 세기 이상 걸리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6. 한국사회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2002년 월드컵 때 보여준 대중의 열기나 의정부 여중생 압사 사건 때 보여준 투쟁, 탄핵 반대나 그 후 총선결과 등을 보면 한국의 시민들의 열정과 에너지는 대단하다. 이 에너지를 결집하려면 현실적이고, 희망을 줄 수 있는 능력있는 정치세력이 나와야 한다. 진보정당들은 도토리 키재기에서 벗어나 통큰 단결을 이뤄야 하고, 민주주의와 복지, 대중의 정치참여, 튼튼한 경제, 남북한의 평화 정착과 격차 해소, 희망의 정치를 보여줘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사적인 이익에 연연하지 않는 대범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런 정당의 출현을 위해서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모두 다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과정은 개인과 정당이 함께 커가고, 개인과 조직의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이 되어야 한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 정치도 멋있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끝.